이재성

이른 아침 산책길이 촉촉하다. 채 가시지 않은 어둠을 타고 내리는 자욱한 안개가 옷 깃을 적신다. 길가의 논에 빼곡하게 솟아 있는 벼 이삭에 수정 같은 이슬이 가득 맺혀 있다. 슬쩍 건드리기라도 하면 금새 수줍은 눈물 방울을 뚝 떨어트릴 것만 같다. 이슬이 하도 맑고 아름다워 발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들여 다 보니 그 곳에 꽃이 만발하다. 벼 꽃이 활짝 피었다.

언뜻 보면 꽃이랄 수도 없을 만큼 잘 보이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향기도 없다. 이름마저도 빼앗긴 듯 ‘자마구’라고 불려 지기도 하고, 꽃이 피는 것을 ‘이삭이 팬다(출수한다)’라고 할 만큼 꽃에 대한 의미를 두지 않으려는 것 같다.

벼 꽃도 분명하게 꽃은 꽃이다. 암술이 한 개 있고 여섯 개의 수술이 존재하는 꽃임에 틀림없다. 대부분의 식물들이 벌이나 나비 등 곤충들에 의해 꽃 가루받이(타가수정)를 하는 반면, 벼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수꽃의 가루가 암꽃에 떨어져 수분이 이루어진다고 한다(암수한그루).

수정을 하는 것 조차도 자기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다(자가수정). 벼 꽃이 피어 있는 기간은 3~5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꽃이라고는 보아주는 이가 없고 찾아주는 이가 없어도 묵묵하다.

안개 자욱한 들판 여기저기에 논을 둘러 보러 나온 농부들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희미 하다. 어떤 이는 물고 머리에서 엉덩이를 치켜들고 물 높이를 조절하는가 하면 간혹 우뚝 자란 도깨비 풀이며 억세 빠진 피 한 포기를 거머쥔 이도 있다.

농부들의 모습을 보며 벼 꽃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확 뜨일 만큼 화려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 닮은 것 같고, 유혹을 느낄 만큼 향기로움이 없다는 것도 닮은 것 같다.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꼭 있어야 할 모습들이 또 그러하다.

‘사흘 굶어 도둑질 하지 안을 사람 없다’는 속담이 있고 가파른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어야 했던 슬픈 얘기는 전설처럼 이어지고 있다.

보일 듯 말 듯이 하늘거리는 벼의 꽃자루에서 우리 인류는 울고 웃으며 역사를 만들었고 인간의 생명 줄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에 경이롭기까지 하다. 도드라지게 화려하지 않고 그윽한 향기가 없어서 그 위대한 업적이 더욱 아름답게 돋보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침신문 모퉁이의 짤막한 기사가 한눈에 가득 들어 온다. 벼 꽃처럼 숨어 있는 듯 알려지지 않은 안 노인 한 분에 관한 미담이다. 막일을 해서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서울의 ㄷ대학에 장학금으로 헌납하였다는 내용이다. 사진 속의 그 모습은 거친 주름에 초췌해 보일 만큼 순박하다. 그러나 평화롭고 인자한 모습은 흡사한 자마구를 보는 듯하다.

화려하고 진한 향기를 가져야만 꽃 이던가. 숨겨져 있고 이름 없는 꽃들이 있기에 원색의 화려함이 돋보이고 향이 더욱 그윽함을 느낄 터인데 우선 눈에 보이는 자극적인 것만을 찾는 세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정수리 위에서 포악을 부리며 내려 쏟던 햇살이 주춤해졌다. 참매미, 말매미, 쓰름매미의 합창도 살랑이는 바람결에 스산하게 들린다. 제자리를 내어 주려는 듯 여름이 뒷전으로 물러서는 계절이다. 금빛 출렁이는 들녘을 기다리며 코 끝으로 자마구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새겨 본다.

 *자마구: 벼나 보리의 꽃가루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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