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이 필요할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치안이란 무엇일까?"
참 궁금하지 않을 수 없고 생활치안이라는 말이 또한 생소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이란 그렇다 치고 치안(治安)이란 「다스려 편안하게 한다」는 식의 한자 풀이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도우미" 라는 단어로 대치(對峙)해 보면 안될까? 생각해 본다.
물론 음과 뜻에서 전혀 새로운 발상이지만 한편에서 치안의 주체가 경찰이라고 생각할 때
그 품은 저의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항간에 "요즘 경찰이 참 많이 변했다"는 말들은 듣기에 따라 과거보다 퇴보 했음을 뜻하는
말로도 비춰질 수 있겠지만 역사 발달의 근간에서 "낳아졌다"는 표현의 함축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점에서 권력의 칼이 아닌 국민의 심부름꾼임을 자임하고 시대에 부응하는 경찰상을
"도우미"라고 역칭하면 안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계추의 쳇바퀴 속도보다 빠른 세계의 문명이 "돌리양"을 탄생시키고, 문화가 다양하고
품격 있게 양산되는 이 시대에 왜 경찰에서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자. 안전띠를
착용하자"라는 홍보구호를 외치고 있을까. 그것도 생소한 생활이란 일상을 등에 업고
말이다.
우리는 질서라는 의식의 세계를 간과해 왔고 어쩌면 회피해 왔는지 모른다.
초기 경제 부흥기를 거처 선진국 문턱에서 IMF의 암울함도 맛보았고 그렇다고 모두가
지식인도, 부자도 되지 않은 "빨리 빨리"의 의식만 팽배한 가운데 서구의 "트림" 같은
느끼함만 배(腹部)에 가득 담았다.
그들에게서, 아니 우리의 숨결 속에서 신앙같이 살아 숨쉬는 질서는 뒷전에 던져버리고
제3자의 손길에 그때그때 버텨 왔을 뿐이다.
이러한 질서는 정상의 문턱에 섰던 우리를 "背信者(배신자)"라 낙인찍으며 사회, 경제, 문화
곳곳에 아픈 편린만 남겨 놓았을 뿐이다.
질서는 쓰임새에 따라 인간생활을 밝게 빛내주기도 하지만 그 이면은 밝음과 어둠을 함께
하는 수은등처럼 어둠의 이빨을 감추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 처녀 선생님의 밝으레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매혹되어 어른의 일상을 보지
못한 어린아이 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정결하고 깨끗한 그 모습이 평생기억으로 남을지라도 현실은 과거의 실상을 계속
파괴하고 우리의 아름다운 정신까지 뭇매를 대고 있음을 아는가? 이러한 환경적,
이율배반적 요인은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 볼때 아마도 생활 속에 덕지덕지 묻어 오장육부에
숙변같이 붙어 있는 우리의 정신일 것이다
'엽기적인 그녀'가 유행의 세태가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은 또한 그 세태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떠한 모임에서 술잔을 높이 쳐들고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마치 일순간
함몰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엽기적인 그녀'가 판을 치고, 질서가 사분오시되는 매도를 당하여도 편익이 증진된
현대생활에서 꽈배기 같이 뒤틀린 fill(필)에 들떠 있는 것 같다.
물론 모든 개인이 조직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짧은 서구 문화의 역사 속에 엉덩이는 생각지 않고 쇼윈도우를 달리는 광고방송의 화면에
몽환되어 무작정 입어버린 청바지의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일단의 대중을 말함이리라.
이즈음 우리경찰은 더 이상 우리의 아름다운 정신이, 뒷동산 앞내울이 파괴되지 않고,
과적에 이른 교통 문화를 정착시키는 등 혁신된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도우미로서 길을
인도하며, 지속적 캠페인이 되도록 기초질서의 중요성을 홍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변해야 한다. 이제껏 해왔던 횃대에 걸쳐진 형식적 변화에서 문명사를 이끈
"혁신"의 개념으로 민족의 앞마당에 나타난 "2002년 월드컵"을 "88 서울 올림픽"수준
이상의 경지로 이러한 변화는 우리라는 자존에 희망을 줄 것이며 이 시대의 진정한 개혁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다".
경찰은 이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뿐이다.
생활의 마디마디에 변질되는 윤활유 보다 강산을 짙푸르게 하는 청수가 더욱 필요하듯이
높은 단계의 질서의식도 아닌 기초질서를 지킴에 무에 그리 어려운가. 이러한 말이 있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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