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심

올 들어 가장 따뜻한 봄날이다. 꽃단장을 한 웨딩카가 먼저 반기는 지인의 결혼식에서 혼주와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여기저기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사심 없이 눈도장을 찍으며 근황을 물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같이 보내면서 가물가물한 기억을 해내느라 정신없이 머리를 굴려야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묵묵히 ‘내 할일만 잘하자 ’하던 아집을 버리고 지역사회에서 나의 역할을 돌이켜 보기 시작했던 때부터는 지역 유지 분들과의 교류도 내 일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언제나 명함을 먼저 내밀며 자신을 알리고 다음 선거를 준비하는 지인들 틈에 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자신을 알린다. 반갑게 명함을 받고 그 사람의 가치관을 들여다본다. 우리를 대표할만한 사람인가, 우리지역을 발전시킬 사람인가, 내편이 되어줄 사람인가, 마음속으로 점수도 매겨둔다. 정책개발을 해야 할 사람들이 이런 곳에 돌아 다니며 시간을 다 보내고 있으니 잘못된 거 아니냐는 남편의 걱정을 남기며 예전에는 돌아서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던 명함을 지갑에 넣는다.

아들이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운영위원에 출마해 달라는 전화가 왔다. 가까운 학교에 보낼 때는 서슴지 않고 맡아 왔던 일이지만 아이들이 도시로 나가면서 대소에 일터를 두고 있는 내가 참석하긴 어려운 일이라 세 명 모두에게 공평하게 중학교까지 만이라는 선을 그어두고 있었는데, 도시의 아이들을 제치고 전교일등으로 입학해서 부모의 위상을 높여준 아들을 위해서 나도 그 정도는 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첫 운영위원 회의장에 들어서자 전년도 운영위원장님께서 먼저 명함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운영위원장을 선출하는 첫 번째 의제를 두고 추천으로 결정하자는 등 몇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정석대로 공평하게 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교육위원을 제외한 9명의 후보가 나란히 적힌 투표용지를 받아 나를 포함한 후보명단 중에서 자신이 추대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투표하는 것이다. 투표결과 전년도 운영위원장이 몰표를 받아 완벽한 당선증을 받았다.

회의가 끝나자 다들 한마디씩 시끄러워졌다. 공산당도 아니고 전원 몰표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 “혹시라도 과반수가 안 나올까봐 내가 나를 찍었더니 이렇게 돼버렸네” 민망해 하면서도 호탕한 웃음을 날리는 운영위원장님이 교장선생님까지 나를 못 믿어 내게 투표했느냐며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하고자 하는 사람, 하려는 의지가 있는 적극적인 사람이 당선되어 참 좋았다. ‘교육이 희망이며 인성이 바로 된 학생이 곧 실력자’라는 운영위원장님의 철학에도 공감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전교 부회장 감투를 위해 첫 선거에 출마하던 시절을 회상해 본다. 무난하게 당선이 되었고 다음해에는 전교 어린이 회장에 도전했었다. 공명정대한 선거를 해야 한다는 아이의 고지식함을 돕느라 선거공약을 만들어주고 홍보전단을 만들며 모든 것은 선거 유세장에서의 연설로 결정될 거라며 연설하는 것을 지도했었다. 지루하지 않게, 자신의 기호와 이름을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전략으로, 그러나 유세장에 들어서면서 내 이상은 꿈으로 물거품이 될 거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학교 내에서 이름이 알려진 운동부원들이 모두 어깨띠를 두르고 동원되어있는 후보1. 체육관 관장님의 제자들이 모두 동원된 후보 2. 운동부에게 후원금과 햄버거간식은 불법선거운동이라는 아이들의 항의에 그것도 실력이라던 운동부코치의 답변으로 절망하며 좌절했었는데……. 끝까지 선전했지만 한 표 차이로 회장 자리를 내어주며 당선된 친구에게 박수를 쳐야하는 아이를 달래며 고민했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외쳐야하나? 침묵이 금인 시대는 다 지나가 버렸나?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당당한 몸짓으로 자신을 알린 위원장님께 소중한 내 한 표를 투표하면서 말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자신을 알리고 행동해야하는 시절임을 실감한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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