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미

친목회 회원 집에 갔다가 깻잎장아찌를 얻어 왔다. 새콤 짭짤한 맛이 좋아 다른 이들 보다 더 달라고 욕심을 부리기도 했다. 마음이 후덕한 집주인은 워낙 주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김치통을 비워야 김장을 한다고 핑계를 대며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제일 큰 봉지를 차지했다. 미안해하는 우리에게 자기는 깻잎을 따서 또 담그면 된다며 푸근한 웃음으로 대신한다.

한달 전 사촌동생의 결혼식이 있어 친정엄마를 모시고 다녀왔었다. 서두른다고 바삐 움직였는데도 대소 터미널에 도착하니 다섯 시가 넘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터미널 뒷길을 걸어내려 오는데 길옆에 들깨가 가로수처럼 심어져 있었다. 갈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돌아왔다는 여유로움 때문인가 파란깻잎이 하늘거릴 때 마다 향기로운 냄새가 퍼진다.

“어머 이 깻잎 좀 봐요 싱싱하다. 그런데 왜 안 따먹었지? 엄마 지금 깻잎 딸 때 아니에요?”

깻잎을 들여다보며 뒤에 오시는 엄마께 물어 보았다. 엄마는 지금 깻잎을 따면 깨가 영글지 않는다고 말하셨다. 왜냐고 묻는 내게 지금 깻잎을 따면 잎이 떨어져 나간 자리들의 상처를 메우느라 영양분이 열매로 오지 않는다고 하셨다. 깨가 영글고 나면 베어서 말리기 전에 따는 거란다. 농사에 무지한 나는 어느 시기에 참깨랑 들깨를 베어야 하는지 잘 몰랐다. 그저 시골길을 지날 때 깻단이 세워져 있으면 말리고 있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시골에 내려와 살지만 농사를 짓지 않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주변사람들에게 물어 보기만 할 뿐이었다.

걸어오는 내내 머릿속에서 엄마의 말씀이 떠나지 않았다. 상처를 메우느라 영글지 못한다는 그 말이 가슴속에 내려 앉으며 지나간 일이 떠올랐다.

남편은 직업군인 이었다. 결혼할 때 상사로 복무하던 남편은 둘째아이가 태어나면서 제대를 했다. 그리고 여동생과 가게를 시작했지만 곧바로 IMF의 타격을 받고 반년 만에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늘어가는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생활을 위해 이것저것 안가리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결국 집을 팔고 정리를 했다. 그리고 시할머님과 시부모님이 사시는 시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십여 년이 흘렀다.

몇 년 동안은 남아있는 빚 때문에 경제적으로, 시부모님의 병수발로 몸과 마음이 모두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나 친정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든 시기가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나는 남편에게 상처 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럴 때 마다 젊어고생은 사서도 한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상처를 메우느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들깨처럼 우리도 상처를 메우며 열심히 살아왔다. 아니 아직도 더 해야 할 것이 남아있을 것이다.

해가지는 가을 들판이 내 마음도 가라앉히는 듯 하다. 오늘 저녁상에 고소한 들기름을 넣어 깻잎을 살짝 쪄내야 겠다. 그리고 남편한테 나도 미안하다고 말해야 겠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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