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섭 서양화가, 인성교육칼럼니스트

 
 

지난 수요일 시골집 원남 새터에서 밭에 심은 김장거리를 보살 필 겸 들길을 걸었다. 걷다보니 길가의 풍경이 정겨웠다. 햇살에 반짝이는 새하얀 억새, 앙증맞은 잠자리꽃, 그사이로 살랑이는 코스모스, 단풍이 한창인 잡목들이 어우러져 눈을 편안하게 한다. 그런데 더욱 정겨운 것은 풀섶에서 들리는 귀뚜라미울음소리이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하여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느 시인의 시 한구절이 떠오른다. “夢遊하는 밤/ 더운 뒤뜰에 나와 / 의자에서 잠들었다./ 들리는 풀벌레 소리 /귀뜰 귀뜰.... 또르륵.../ 찌륵 찌이르륵 뚝.../ 돌쯔 돌쯔....” 가끔 귀뚜라미소리와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소리들이 합창단처럼 화음을 이룬다. 이렇게 도심 속에서 귀뚜라미소리를 들으니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시골에서 자란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시절 시골에선 어디를 가나 가을이 되면 정겹게 울어대던 귀뚜라미울음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섬돌 밑이나 마루 밑에서 밤새도록 울어댔다. 어린 시절 풀섶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소리를 듣고서 친구들과 귀뚜라미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소리가 들려서 다가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소리를 멎어 귀뚜라미를 찾아내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친구들과 귀뚜라미를 잡으려고 풀섶 이곳저곳을 뒤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렵사리 귀뚜라미를 한 마리쯤 잡으면 집에서 기르겠다고 난리 법석을 피웠다. 귀뚜라미를 넣을 여치집을 밀짚으로 만들어 마루구석 음침한 곳에 놓아 두곤 했었다. 귀뚜라미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싶어서였다. 사람이 옆에 있으면 울지 않기 때문이다. 저녁나절 몰래 방안에 숨어 있으면 또르르 또르르 울곤 하였다.

동생과 킥킥거리며 숨죽여 웃던 그 추억이 새롭다. 수컷은 낮에 짝을 찾기 위해 풀섶에서 연속해서 우는데 우리들은 이 소리를 듣고 귀뚜라미를 잡으러 다녔다. 귀뚜라미를 잡느라 풀숲을 헤치고 다니니 팔뚝에 풀에 스치우는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그래도 피부연고 한번 바르지 않아도 탈나는 아이들 없었다.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나 어른들까지도 너무 인스턴트식 소리에 의한 감정에 사로잡혀 이기적으로 변하는 건 아닐까. 음(音)은 소리의 여운이며 마음(心)은 소리의 근본이니 소리는 곧 마음을 대표하는 그릇이라고 한다. 자연의 소리는 일단 마음이 편안하다. 자연의 소리는 지친 뇌를 쉬게 해준다.

솔바람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새소리를 접하면 뇌파가 나와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하나로 통일시키며, 무념무상의 경지로 이끌어 준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이자 소리요법 연구가인 앨버트토머티스박사는 5000Hz-8000Hz 사이의 소리가 사람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치료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자연에서 발생한 소리들이 하는 음역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상쾌함과 에너지를 전해주는 소리가 자연의 소리인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시작이면서 끝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삭막하고 틀에 박힌 생활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몸과 마음은 피곤해진다. 문명의 발달은 우리의 삶을 편하고 윤택하게 만들었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은 무언가 허전하게 한다. 주말마다 온가족이 함께 자연의 소리와 풍경을 듣고 감상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 감이 어떨까. 우리들의 메마른 정서 순화를 위해서 말이다. 산새소리, 풀벌레소리, 그리고 오색단풍드는 소리, 거기다가 저 파아란 가을하늘의 새털구름 흘러가는 소리까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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