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환 강동대 사회복지행정과 교수

 

 
 

얼마 전 몇몇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진리가 있나?’라는 약간은 어울리지 않는 주제의 논쟁이 있었다. 우리 사회가 너무 음모론과 주의주장(主義主張)이 난무하고 있다는 이야기 속에 나온 주제이다.

지식에 대한 관점은 크게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로 구분된다. 전자의 대표적 학자인 칼 포퍼는 절대적 지식이 있음을 주장한다면, 후자의 대표적 학자인 토마스 쿤은 상대적 지식을 강조한다. 칼 포퍼는 진리를 확인하는 역설적 방법으로 진리라고 주장이 틀림을 증명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주장이 있다면 검은 백조를 찾아냄으로써 그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검은 백조의 확인을 통해 보다 새로운 차원의 강화된 지식을 얻게 된다는 논리이다.

칼 포퍼는 이를 ‘반증가능성’이라 지칭하며 반증을 통해 진리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음을 주장한다. 주장의 틀림을 확인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탄생시키고 또 다시 재탄생을 거듭하며 진리에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신의 존재’와 같은 영역은 진위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학문이 아닌 종교의 영역으로 자리메김 한다.

반면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통해 지식의 상대성을 주장한다. 사실 쿤은 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과학의 흐름을 연구하면서 하나의 중대한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서양의 천체물리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즉 ‘태양이 지구를 돈다’라는 주장을 기본 전제로 하여 논의되어왔으나 지동설의 출현을 통해 기존과는 전혀 다른 지식체계가 수립되어 왔음을 주장하였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지식체계 변화를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따르면 현재의 지식 혹은 진리라 믿고 있는 것은 상대적 지식일 뿐 언제, 어떻게 새로운 지식체계의 출현에 의해 부정될지 모르는 상대적 진리체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 우리 사회의 지식관은 상대주의를 뛰어넘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이 대세를 장악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객관적 실체를 확인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주장에 사실들을 선택적으로 끼워 맞추는 식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혼란이 발생하는 이유는 진리의 출발이 ‘사실(fact)’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기본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사서(四書)의 하나였던 대학(大學)은 ‘평천하(平天下)’의 출발은 ‘격물(格物)’, 즉 사물의 이치이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주장에 매몰되어왔다. 우리도 이를 답습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반성해보야 한다. 가치(value)는 변할 수 있어도 사실은 변할 수 없다. 조금만 사실관계를 확인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을 자신의 가치에 매몰되어 판단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일이다. “가치에는 힘이 없고 사실에 있다”는 은사님의 말씀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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