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문 음성군청소년상담복지센터장

 
 
정유년을 맞아 제법 눈발이 거세다.

온세상을 하얗게 뒤덥고 있다.

눈발이 거세게 내려올수록 세상은 순백으로 물들어간다.

지난해부터 불거진 국정농단 사건으로 청문회가 지속적으로 TV를 통해 중계되고 증인으로 출석한 이들은 거짓증언으로 또다시 회자된다.

이런 뉴스를 연일 접하면서 골머리가 아프다.

어쩌다가 사람들의 본성이 찌들고 악해지고 파렴치하게 변모해가는지?

인간이면 마땅이 지녀야 할 양심이라는 것이 있을텐데 양심은 어디갔을까?

세상에 별에 별일이 다있다고 하지만. 인간으로서 본연이 지켜야 할 본성이 있지 않겠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과 논의는 춘추전국시대 맹자가 살던 시대에도 통렬하게 벌어졌던 논쟁 중에 하나였다. 그 대표적인 논쟁의 대상이 바로 순자의 성악설과 맹자의 성선설일 것이다. 이런 논쟁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인간은 태어날 때 선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맹자의 스승격인 자사는 중용을 통해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고 봤고, 그 성을 따른 것은 인간의 길이며, 그 길이 온전치 않을 때 수리하거나 새 길을 내서라도 하늘이 부여한 길로 가야한다고 설파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청정한 본성의 삶이야 말로 인간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청정한 본성으로 가는 길은 어떠한 길인가?

양심회복을 통한 참다운 삶의 길이다.

현대인들에게는 물질문명의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양심이라는 말이 거추장스럽게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다수의 피해자가 속출해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

그러나 공생의 삶이 파괴되면 인간은 멸종할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생의 삶의 구조를 갖고 사는 종이 바로 식물과 곤충일 것이다.

식물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위해서는 촉매작용을 하는 곤충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벌과 나비 등은 꽃에서 양분을 취득하는 상생의 구조이다.

인간에게 이런 상생의 구조를 갖기 위해서는 양심의 회복만이 공생을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은 맹자이다.

맹자는 양심을 양지와 양능으로 구분했다.

양지는 인간으로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다시 말해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가르쳐서 아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프로그램화 되어 있어서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양능은 부끄럽고 미워하는 마음인 정의의 마음이기도 하며, 남을 괴롭히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해 분노가 치미는 상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남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며, 불쌍한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해 남몰래 도와주는 ‘측은지심’의 마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양지와 양능의 발휘는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기 때문에, 청정한 본성의 마음으로 돌아가 발휘하면 이것이 곧 양심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이라는 감정도 순수한 양심에 기반하여 발휘되면 천지에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양심을 저버린 자신의 욕심에 치우치면 양심이 가리운 채 남에게 피해를 야기하고 만다.

그렇지만 본인의 양심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란 홀로 아는 자리를 진실되게 해야 한다는 신독의 경귀가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이런 양심을 짓밟는 것은 자신의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된다.

욕심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맞게 발휘하는 것이다.

새해 내리는 순백의 눈발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마음에도 순백의 물결로 양심의 촛불이 타오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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