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영 섭

 
 

요즈음 국회의원들을 생각하면 쉽게 떠오르는 것이 반말. 폭언. 폭행을 일삼는 넉살좋은 모습이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청문회나 국정조사 때 여야를 막론하고 담당자나 참고인을 호통치고 모욕을 주는 재미가 쏠쏠했던 국회의원들이 언어폭력 앞에서 무릎을 꿇을까? 아니면 지지기반 수단으로 이용할까?

또한 정치인들의 신종홍위병 얼굴 없는 막말과 무소불위 정치인들과 국회의원들 사이의 대결 결말이 궁금하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보고 배울까봐 안타까울 뿐이다. 직접대화보다는 인터넷과 SNS로 소통하는 세상이 되더니 막말과 욕설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막말과 욕설이 마치 일상의 언어인 양 뿌리내리고 있다. 요즈음에는 길을 걷다보면 많은 청소년들과 숙녀들의 대화에도 욕설이 섞여있고 막말이 일반화 되어있다. 청소년들은 같이 욕설을 하지 않으면 끼워주지 않는 풍토가 만영하고 있다. 심지어 자식들이 부모님께 반말과 욕설까지 하는 패륜을 본다.

욕설은 삿대질과 폭언·폭행으로까지 이어진다. 고운 말과 고운문자는 쪽도 못 쓰는 세상이 되었다. 욕설은 상대방을 모욕할 때에 쓰이는 언어와 행동이다. 타인에게 모욕을 주기 때문에 점잖지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다. 더 나아가 행동으로 하는 욕도 포함된다. 손가락으로 욕을 하거나 삿대질이 그것이다. 욕설은 사전적 의미대로 남을 저주하거나 불쾌감만 표현하는 건 아니다. 본인과 친한 사람에게 친밀함을 드러낼 때 욕설을 사용하거나 쾌감을 느낄 경우 욕설을 감탄사 대신에 사용하기도 한다. 보통 친밀한 관계에서 욕설을 자주 사용한다.

본인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욕설을 쓰는 경우도 있다. 남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잘못된 생각을 하는데 본인이 욕을 하면 남들이 두려워해 본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인식해 욕설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자존심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이 없을 때에 욕설로 보충하는 것이다. 본인이 조금이라도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을 접하게 되면 다짜고짜 욕을 하면서 자기방어적인 심리를 사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자꾸 경험하게 되면 성격파탄자가 되어 기본적인 인성 자체가 험악하게 바뀌는 경우도 많다.

살다 보면 욕이 나오는 상황은 셀 수도 없이 많긴 하다. 욕은 사회화 기능을 가지기도 한다. 술자리에서 적당히 정치인이나 직장 상사를 욕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이런 자리에서 동조해주지 않으면 분위기가 썰렁해질 수 있다. 욕은 혐오하는 것이 정상이나 술자리 등 다들 욕을 하는 분위기의 상황에서는 같이 살짝 동조해주는 것이 당장은 이로울 수도 있다.

동아대학교 이점식교수에 의하면 한국인의 욕의 유형과 특징에 근거하여 욕 속에 내재된 인간 본성을 분석한 결과 인간은 배설적 존재, 공격적이며 파괴적 존재, 방어적 존재, 성적 존재, 유희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욕은 부정적인 기능도 있지만,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정서를 정화시켜 정신건강에 도움을 주며,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욕은 친밀감을 높여주어 인간관계 형성에 기여하고, 자기가 속한 집단을 결속하며,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기도 한다고 정의 하고 있다. 욕이야말로 잘해서 본전이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욕은 궁극에는 욕한 자신이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욕으로 얼룩지는 싸움에는 절대로 이기는 사람이 없다.

물론 얻는 것도 없다. ‘상처뿐인 영광’이라도 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오욕뿐인 상처’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고 보니 욕이란 망가지는 과정의 시발점을 제공한다. 흉하게 망가지지 않으려는 생각을 한다면 욕에도 품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욕쟁이할머니들의 경우에도 그 나름의 욕 철학은 있다는데,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될성부른 놈들에게만 욕을 한다고 한다. 욕은 어디서 생겨나오는 것일까.

전혀 다듬지 않고 길들이지 않은 인간 본성의 언어가 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이 순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미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치유 상담 전문가인 정태기교수는 사람의 모든 내적 상처의 근원과 불행의식 속에는 언젠가 그 사람을 할퀴고 갔던 누군가의 욕설이 작용한다고 말한다. 옛말에 ‘한 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지만 그 반대로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 했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입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라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고운문자 한구절로 만냥 빚을 갚고, 반대로 막 문자 한 구절이 상대편 심장에 박혀 재앙을 불러오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욕은 분명 사람의 나쁜 본성과 결부된 것이다. 사람의 나쁜 본성을 변화시키려는 구체적인 사회정화운동과 청소년들의 언어순화 교육이 절실하다.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도 막말과 막 문자의 무덤을 하나씩 팔 때가 된 것은 아닐까? 허준이 쓴 동의보감의 한 구절을 되새겨 본다.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 통하면 아프지 아니하고 통하지 아니하면 아프다고 했다. 이제는 바른말 고운 말과 선풀의 문자소통으로 온 마을이, 온 나라가 세대 간, 남녀 간, 지역 간, 계층 간 화기애애한 소통의 꽃을 활짝 피워 밝은 세상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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