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의원에는 노인 환자들이 많이 오신다.

진찰 전 동네이름을 보고 고유의 이름이 있었는지 마을의 유래가 있느냐고 말을 건넨다. 농사철 이라면 비가 이야기꺼리다. 가물어서 걱정, 너무 많이 와서 큰일이라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들은 내용을 기억해 두었다가 같은 동네에서 오시는 분에게 물어보면 쉽게 친해질 수가 있다.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시골에는 혼자 사시는 노인들이 많다. 서로 이야기 할 기회가 적어서 인지 적적하게 지내시는 것 같다. 할머님들 경우 한마디만 꺼내면 줄 줄 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어디가 아프다는 얘기, 동네소식 등 신세타령도 섞어서 말이다. 혼자 사시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대화를 통해서 의사와 환자의 거리를 좁히는 점도 있지만 나는 얘기 속에 묻어나오는 삶의 지혜를 듣는 일과 큰 욕심 내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바쳐 후손을 키우는 생생한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한편으로는 농촌이 노령화 되어간다는 것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쓸쓸한 생각이 든다.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에서 이 세대가 가고 나면 농사는 누가 지을 것인가 하는 노파심도 생긴다.

애써 사귀어 놓은 환자들이 계절이 바뀌면 뜸해지거나 오시지 않는 경우가 종 종 있다. 한참 뒤에 알아보면 많이 아파서 오랫동안 입원을 했었다 거나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다.

내가 일하는 진료실이 시장 통에 있어 닷새에 한번씩 서는 장날이면 시끌벅쩍 해진다. 이날은 은근히 궁금했던 사람, 보고 싶은 얼굴들이 오신다.

지금 내 마음에는 한참을 기다리는 환자가 한 사람 있다. 장날이 수없이 지났고 월말이 몇 번이나 흘러갔건만 오시지 않는다.

삼년 전 봄날 한쪽 눈이 흐려 보인다며 오셨다. 연세가 팔십이 넘었는데도 옷차림이 말쑥하시고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갖고 계신 소지품들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한마디로 말하면 영국 풍 노신사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런 분 이셨다. 수술할 때 보호자가 없어도 되느냐고 하시기에 더욱 호기심을 끌었다.

백내장 수술을 했다. 다음날 잘 보인다고 좋아하시며 수고 많았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하셨다. 정말 잘 보이는 줄만 알고 망막 상태는 자세히 보지도 않고 치료만 부지런히 해드렸다.

매일 오시기에 친해져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모자는 큰딸이 외국 갔다 오면서 선물한 것이고 안경은 막내딸이, 지팡이는 둘째딸이 사주었다고 하시면서 슬하에 딸만 여덟을 두셨다고 하신다. 부인은 몇 해 전 돌아가셨지만 딸들이 용돈도 보내와서 월말에는 농협에 들리는 것도 재미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심심하실까봐 화면이 큰 텔레비젼을 장만하면서 일본 방송도 나오게 설치해 주었다고 자랑도 했다. 이것저것 마음 쓰며 보살펴 주는 딸들 덕에 부족함이 없이 즐겁게 살고 있다고 하시는 말씀이 딸만 가진 나에게도 기대감을 주는 것 같아 듣기에 흐뭇했다.

두 달 후 안경돗수를 조절하려고 시력을 재니 교정시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정밀검사를 해보니 황반부에 노인성 변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수술 전에 자세히 진찰하여 수술 후 시력이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려야 했는데 소홀히 한 것이었다.

보통은 백내장으로 수술을 하면 젊은 시절 같이, 본인들 표현을 빌리자면 “새는 날 같이 환하게“잘 보일 것이라고 잔뜩 기대를 한다. 그 바램에 못미치면 불평과 원망이 대단하다. 그래서 수술 전에 미리 설명을 해 주고 있다. 예상치 못한 질환이 있거나 합병증이 생길 수 있어 예전 같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런데 이 분은 왜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잘 보인다고 만족해했을까 의문을 품으며 다음날 미리 설명을 못 드린데 대해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나의 진지한 사과를 너그럽게 넘기면서 수술 전 보다 조금이라도 잘 보이면 만족한다고 하시는 품이 너무도 여유롭게 느껴졌다.

십여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중환자실에 두 달 가량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중상이어서 가족들은 거의 포기상태까지 갔으나 경우 생명을 건졌다고 한다. 그 후 삶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졌다고 하셨다. 다시 살아나서 사는 시간은 덤으로 사는 인생으로 여겨 분한 일이나 억울함, 어려운 고통이 찾아오면 그때 내가 죽었는데 라고 생각하면 모든 문제가 쉽게 정리된다고 말씀하신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모든게 감사해. 밥 먹는 것, 산보하는 것, 하다못해 TV보는 것 등 일상의 어느 것 하나 하찮은 게 없고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어. 수술 잘 해주어 고마워”라는 말씀을 듣고 궁금증이 풀렸다.

어렸을 적에 막연하게 나도 오십이 넘으면 삶에 대해 동네 어른들처럼 자연히 슬기로워 지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십을 넘어 육십을 바라보는 고개에 가까이 왔어도 지혜로운 것이 별로 없다.

도시에 살면서 어느 날 내 삶의 초점이 성취와 소유에 너무 맞춰져 있는 자신을 보고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큰 마음먹고 사년 전 시골로 옮겼다. 막상 와 보니 도심에서 일 하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남아도는 것은 시간이요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모든 것을 시골생활에 맞게 궤도 수정이 필요했다. 나름대로 생활하는 방법을 만들어나갔다. 우선 읍내 지리를 알려고 시간 나는 대로 주변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인근 면 소재지나 군 지역까지 넓혀나갔다.

책을 보고 산에도 부지런히 다니면서 적응해 나가자 이모저모 생긴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와 즐거움이 찾아 들었지만 그 까닭을 몰랐었다. 그런데 수술한 것을 인연으로 해서 포기한 만큼 채워주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인생의 선배를 만나 그 해답을 얻었다. 마치 수술 받은 환자가 눈을 뜨고 환하게 보듯이 답답했던 내 마음이 밝아오는 새날처럼 환하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가진 것에서 가치를 찾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계신 그 어른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아가도 후회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린처럼 목을 늘이고 문간을 바라본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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