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역사에 대한 궁금증 풀어주는 계기 마련
음성의 글속에는 설성의 뜻이 포함돼
무극은 전국 산천 고을 이름중 가장 으뜸

<음성역사 바로알기>

-왜 음성이라 이름하였나?

음성(陰城)의 이름이 생긴 것은 신라가 문무왕 8년(668)에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경덕왕 16년(757)12월에 신라 전국에 9주를 두고 군현(郡縣)의 명칭을 고칠 때 잉홀(仍忽)을 음성(陰城)으로 고쳤다.
이당시 전국의 이름이 속되고 방언이 섞여 아름다운 이름으로 고치고자 당나라의 한자음으로 표기하여 「음성」이라 하였다.
우주 만물의 모든 이름이 지어질 때 동물·식물 산천이 그냥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김새와 모양에 따라 산천의 형상에 따라 음양설(陰陽說)과 풍수설(風水說)에 의해 이름이 지어졌다.
음양설로 볼 때 음양의 음(陰)에 해당, 무극(無極)→양(陽)→정(精)→음(陰)의 단계에서 맨 마지막 「음」에 이르러 가장 성숙한 이름이라 한다.
음양설을 말할 때 처음 만들어지는 것이 양(陽)인데도 양음(陽陰)이라 하지 않고 가장 늦게 만들어지는 음(陰)을 먼저 말하여 음양설이라 한다.
사람은 양(陽)을 갈구하다가 음(陰)을 찾지 못하고 만다. 「음」을 만나는 사람은 성인(聖人)군자(君子)라 한다. 그만큼 음(陰)은 높은 것이다.
음성의 지형(地形)은 생김새와 모양 산천의 형상이 음양설의 음(陰)에 부합되어 있다.
옥녀봉(玉女峰)은 음성읍의 머리로 음양의 음(陰)에 해당되어 「음」의 가장 아름다운 옥녀에 비유하였고 「음」은 「여자」에 속하여 「여자의 몸체」를 말한다.
그리하여 옥녀는 신성한 여체(女體)이고 숭상하는 대상이며 가장 존중받는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양이 음을 찾듯이 어머니가 되려고 양을 찾은 것이다.
그 형상이 지명에 나타나 있어 여자가 분단장하기 위해서는 거울이 있어야 하고 잡티 제거에 필요한 「족집게」분단장(화장)의 분(粉)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석경(石鏡=石明=돌맹이) 분티 족집개의 지명이 생겼다.
분단장 곱게하고 양(남자)을 만난곳이 만생산(萬生山)으로 음양이 화합되므로 만물이 생긴다하여 「만생」이라 하였다.
음양화합의 결실이 잉태가 되어 만생산 아래를 태봉(胎峰)이라 하였으며 이 태봉을 음성읍의 수구관쇄지(水口關鎖地)라하여 물 구멍을 닫는 곳이라 명하고 이 음의 물은 옥같이 귀한 물이라 해서 그 산을 옥천산(玉川山)이라 이름하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옥녀가 양과 화합하여 잉태하므로 성스러운 어머니가 되어서 자식을 낳아 자식을 가르치는 학교(음성향교)를 어머니 품속에 세웠고 자식이 잘되기 위해 축원의 장소를 세워 빌게 하였으니 옛 흥천사(興天寺)로 지금의 묘정사(妙精寺)라 하겠다.
또한 많은 자식을 낳아 먹고살수 있는 넓은들을 주었으니 그 곳이 평촌들로 이곳을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라 하여 풍수설에 「만생산하에 가활만인지지」의 명당 자리가 있다하여 옛부터 수많은 풍수가들이 이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만생산을 헤매이던 곳이다.
위대한 어머니는 한 사람에게만 복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음성의 땅을 조화신공(造化神功)의 땅이라 하고 음양설 풍수설로 만들어진 축복(祝福)의 땅, 복지(福地)의 땅이라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음성을 어머니 품속이라 말하는데 영웅·호걸이 태어나는 땅이라해서 그 탄생을 막기위해 임진왜란때 이여송이 음성의 머리, 어머니 머리인 옥녀봉에 혈을 찔렸다는 기록이 있다.
옥녀봉의 단맥처(短脈處)는 음성4대 단맥처의 한곳인데 근세(近世)에 어떠한 연유를 붙여 제2의 혈을 끊어놓는 흉칙한 자행을 하여 놓았다.
이렇게 음성의 이름은 음양설과 풍수설에 의하여 만들어진 곳이다.
위대한 음성 이름은 이토록 음양의 가장높은 이름을 가져 우리나라 지명증이 보다 더높은 곳이 없고 유일하게 음(陰)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말이 「음」이라서 그뜻을 모르고 나쁜 언어로 희롱을 하고 있음은 삼가야 할 것이다.
가꾸고 다듬고 보존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아무리 천재라도 그것을 가꾸고 다듬어 주지 못하면 둔재보다 못하다.
음성(陰城) 그 이름 위대한 이름이 아니겠는가?

(참고:본연구회 발간<음성유래>)

- 음성과 설성의 관계

옛부터 음성(陰城)을 설성(雪城)이라 불러왔다. 고을 이름은 음성인데 설성이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조상들은 음성이름 대신으로 설성이란 말을 통용하여와 문장가 시인들의 글속에도 설성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였다.
물론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음성이 분탕질 당해 고을 이름마저 없애버리는 수모를 겪다가 광해 10년 음성이 복구되면서 읍호를 설성이라 불러와 정식 고을 이름이 되기도 하였으나 조선초에도 설성이라는 이름은 음성대신으로 공공연하게 사용한 것이 옛 시인들의 글속에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 뜻은 글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음성(陰城)의 글속에는 설성(雪城)의 뜻이 포함되어 그 속에 담겨져 있다.
어떻게 음성의 글속에 설성이 포함되어 있느냐고 반문하겠으나 그 뜻은 이러하다.
음(陰)과 설(雪)의 같은 뜻은 음(陰)은 형야(影也)로서 그림자이다.
형(影)은 형야(影也)로 형상이다.
형(影)은 체야(體也)이며 체(體)는 신야(身也)로 몸 즉 사지이고 신(身)은 궁야로서 몸이며 궁은 신야(身也)가 되어 곧 자신의 몸을 뜻한다.
그러면 설성(雪城)의 설(雪)은 음응(陰凝)을 이르는데 음응은 육출화(六出花)이고 육출화는 육화(六花)를 말한다.
육화는 「눈송이가 여섯모인 결정(結晶)을 뜻하며 눈을 말하므로 눈의 결야(結也)로서 눈이 엉김을 음응(陰凝)이라 하니 음응은 「눈의 결정체 그 자체의 몸」을 뜻한다.
그러므로 음(陰)은 자체 몸을 뜻하고 설(雪)은 「음응의 자체 몸을 뜻」하므로 음(陰)은 바로 설(雪)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음성(陰城)은 바로 설성(雪城)이 되어 설성이라 통칭하였다.
음(陰)의 몸체는 음양으로 볼 때 음(陰)은 여자에 속하여 「여자의 몸체」를 말하고 성(城)은 도읍(都邑)의 고을을 뜻하여 큰 고을은 주(州) 작은 고을은 성(城)을 붙여 지명에 사용하였다.
어떤이는 음성의 음(陰)은 음지(陰地)로 음지는 습(濕)이므로 수(水)로 해석하여 물과 관련지어 「물골」이라하나 이는 음(陰)속에 물이 있는 것이다.
음성은 「여자의 성」그 자체로 풍수설에 적용되어 하나의 여자의 성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음성과 설성의 글 뜻에는 이런 관계가 있으며 음성 전역을 설성이라 통칭할 수 있으나 옛부터 무극쪽을 설성이라 부른데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금왕읍 호산리, 무극리일부, 정생리, 생극면의 팔성리, 관성리, 병암리, 도신리는 옛 음죽현(陰竹 )에 속했던 땅으로 음죽현에 설성산(雪城山)이 있어서 음죽을 설성이라 불러왔던 것이다.
음성에는 이같이 다른 두 개의 설성이 있었으나 설성은 정식으로 읍호가 되었던 음성의 또다른 지명이었고 그 뜻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래서 읍호로 지명하면서 수정산을 설성산이라 별칭하였던 것이다.

(참고:본연구회발간<음성유래>)

- 무극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나?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무극(無極)이라 한다.
우주 만물이 소생하려면 기(氣)가 발동하는데 무극에 기가 발동하게 되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기가 생긴다하여 무극을 무기(無氣)라 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이다.
무극에서 기가 발동하여 처음 생기는 것이 양(陽)이고 양에서 기가 발동하여 생기는 것이 정(精)이며 정에서 기가 발동하여 생기는 것이 음(陰)이 된다.
음에서 기가 발동하여 처음 자리인 무극의 본래 자리로 오는데 이때는 무극이라 하지않고 태극(太極)이라 한다.
더 이상 클 수 없는 태극에서 기는 계속 발동하여 양·정·음을 반복하여 순환한다.
이를 사계절로 나누면 무극은 봄이고 양은 여름이며 정은 가을이고 음은 겨울이 된다.
사람은 아무리 천치 바보라도 음양을 저절로 알게되어 남녀가 합해져 제2세의 씨를 남기는 것이다.
우주를 놓고 볼 때 남극과 북극은 거대한 얼음덩이 하나로 만들어져 남극에 가도 북극에 가도 얼음이다. 그 얼음덩이의 기점이 무극이 된다.
그래서 무극과 음성(陰城)은 바로 인접해 있어 사람이 지명을 만들 때 음성(陰城) 바로 넘어에 무극(無極)이라 지명한 것은 이러한 무극설(無極說) 태극설(太極說)을 응용하여 음양설(陰陽說)과 풍수설(風水說)을 가미하여 이름을 만들게 되어 무극(無極)이라 하였고 무극을 옛부터 무기(無氣)라 불러 왔던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어 음성(陰城) 이름과 함께 무극(無極)이름은 우주의 무극설·태극설·음양설·풍수설의 복합적인 원리에 의하여 이름이 만들어져 우리나라 산천 고을이름중에 가장 으뜸으로 시작된 이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지명지에는 무기를 「냇가에 풀이 많아서 무기라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기가 발동하여 풀이 생긴 기(氣)의 원리를 의미함이 아닌가 한다.

(참고:본연구회발간<음성유래>)

- 잉홀의 이름이 남아있는 지명

음성에 처음으로 지명이 생긴 것은 고구려 땅이 있을 때 잉홀(仍忽)이라 하였다.
잉홀은 고구려의 방언으로 「봉화」인데 신라땅이 되면서부터 변칭되었다.
고구려 지명에는 홀(忽)자로 말끝을 맺은 것이 많고 신라에서는 불(弗)로 많이 칭하였는데 弗이 변하여 火로 된 것은 火의 방언이 弗이기 때문이다.
弗이 또 바뀌어 벌(伐)이 되는 등 변하여 칭한 것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잉홀이 가섭산에서 비롯되어 가섭산 주위에는 忽자가 변한 伐·火자가 생겨 한벌(閑伐), 광벌(廣伐), 목벌(木伐), 화산(火山)등의 지명이 남아있게 되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벌(閑伐)은 그후 한벌(閑筏)로 쓰는 것을 또 변칭된 글자이다.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은 말하기를 "방언의 말들이 자주 변칭하여 일정하지 않음을 보고 천년뒤에 무엇을 쫓아 믿겠는가."라고 하였다.

(참고:본연구회발간<음성유래>)

- 처음으로 생긴 마을은

음성에서 처음으로 생긴 마을은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때이다.
음성이 고구려땅이 되던 장수왕 77년(489)에 잉홀(仍忽)이라 이름하고 잉홀관청이 있던 곳은 기곡(基谷-음성읍 평곡리 터골)이고 마을(관아)을 잉근내(仍斤內)라 하였다.
임진왜란때 「잉근내」를 없애 버렸다하여 혁파(革罷)라하고 그곳을 「혁파댕이」라 부른다.
혁파댕이는 지금의 음성역에서 오리골(梧里谷)로 가는 부근을 말하는데 이곳에 옛날에 마을이 있어서 「잉근내」라 하였다.
이런 연유로 하여 음성사적 군명(郡名)에 잉홀(仍忽), 설성(雪城), 잉근내(仍斤內)라 하였던 것이다.
또 음성읍 한벌리에는 「낡은터」란 곳이 있다.
「낡고 늙은터」의 준말이 「낡은터」로 오래 되었다는 말이다.
그 근원은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때 음성 이름을 잉홀(仍忽)이라 하고 그 이름이 가섭산에서 비롯되어 그 아래에 있는 마을이 「낡은터」이다.
낡은터를 한자로 하면 나을근대(羅乙斤垈)로 한벌리에서 오래 살아온 순천박씨 족보에 기록하였다.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에는 「터텃골」이 있다.
이곳은 「가래들」로서 「가라가야들」이다.
음성이 가라가야(加羅加倻)였을 때 가라가야의 들판이 되어 가라가야의 터였는데 몽고사람 가래도치라는 사람이 와서 절을 짓고 살았다는 전설이 있어 「터에 터가 있는 골짜기」라 하여 「터텃골」이 되었다.
이 유포리에 방죽이 있어서 「유포방죽」이라 부르는데 옛날 이 방죽을 가이곡제(加耳谷堤)라 하였으므로 가라가야의 근원이다.

(참고:연려실기술,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조선환여승람 충주읍지, 지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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