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섭 인성교육칼럼니스트

 
 

녹음방초승화(綠陰芳草勝花)라는 용어가 있다. 우거진 나무 그늘과 싱그러운 풀이 꽃보다 낫다는 뜻이다. 영화 서편제 사철가로 유명세를 탔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데가 있더냐/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 푸른 잎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아름다운 때라는 것이다.

녹음은 연초록으로 시작하여 진초록으로 깊어진다. 새댁과 같은 청순함과 어머니 품 같은 포근함과 아버지 뚝심 같은 믿음을 준다. 그리움의 색깔이기도 하다. 또한, 가까이할수록 편안하고 차분해 저 마음의 치유에도 도움이 된다. 신록은 깨달음을 느끼게 하고, 대자연의 신비에 취하게 하며 하늘을 더욱 맑게 한다. 생명이 고동치고 약동하는 5월이다. 세상이 급속도로 빨라지면서 인간의 삶도 정신없이 분주해졌다.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말이었다.

그런데 자동차, 비행기, 로켓 등이 나타나면서 세상은 급속히 빠르게 돌아갔다. 이제는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등장해 전 세계를 동시에 휘젓고 다닌다. 물론 이런 것들이 인간의 삶에 편리함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세상은 지금 온통 무서운 속도의 경쟁 속에 휘말려있다. 전 세계가 동시에 화면에 잡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 더 '빨리빨리'를 외친다.

건널목에서도 적색 신호등에 멈춰 서있다 초록색 불이 켜지자마자 단거리 선수들처럼 서로 밀치며 뛰쳐나간다. 외국 여행 때에도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자마자 미리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통로로 나가 줄을 선다. 국제적으로 창피한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짧게나마 생활해 본 외국인들이 어김없이 자주 듣는 말은 아마도 ‘빨리빨리’일 것이다. 한국인하면 빨리빨리를 연결시키는 그들의 기억 속에는 활기차면서도 성질 급한 모습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의식주의 문제는 해결된 선진국대열에서 살아가니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삶의 여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묵자는 ‘자리가 불편한 것이 아니고 나의 마음이 불편한 것이며 재산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만족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전라남도 담양에 가면 그림자를 쉬게 한다는 정자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식영정은 명종 15년에 김승원의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어 준 것이다. 식영정에 담긴 뜻은 장자 잡편의 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가 ‘공자 당신은 왜 그렇게 쓸데없이 바쁘게 사는가?

책임 있는 직책에 있는 것도 아닌데 세상에 인(仁)을 실현하겠다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꼴이 참 안 됐다. 그렇게 뛴다고 될 일 같으냐?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림자(影)와 발자국(迹)은 열심히 뛸수록 더 따라붙는다. 그늘에 들어가야 그림자가 쉬고, 고요한 데 머물러야만 발자국이 쉰다.’고 어부가 공자에게 충고하는 대목으로 휴영(休影)과 식적(息迹)의 줄임말이 식영(息影)이 됐다고 한다. 그만 바쁘게 헐떡거리며 살아라! 이제 좀 쉬면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봐라! 이게 식영정의 참뜻이다. 사람의 몸은 마음을 따르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림자를 쉬려면 몸을 쉬어야 하듯이 몸을 쉬려면 마음을 쉬어야 한다. 그림자가 무서워서 아무리 도망쳐도 그림자를 떼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쉬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주인공인 마음이 도리어 그림자인 몸에 구속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내 삶이 늘 평탄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참 우여곡절이 너무나 많은 법이다. 어찌 보면 그리 짧지 않은 삶에는 평탄한 삶의 길보다는 오히려 험난하고 예기치 못한 곡절들이 너무나 많은 게 우리 삶일 것이다. 그런 삶 속에서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며,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내가 건너야 할 횡단보도 앞의 신호등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파란 불로 바뀌어 약속 시각에 늦지 않게 도와줄 때도 있다. 그러나 어찌 내 앞에 파란 불만 켜지겠는가? 파란불도 켜졌다가 빨간불도 켜졌다 하니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신호등 앞에서 기다려야 한다. 빨강 신호등 앞에서 파란불이 들어오길 기다리듯이, 인내와 끈기를 갖고 파랑 신호등이 켜질 날을 기다려야 한다. 그럼에도 삶의 문제만 생기면 여유를 잃고 그 문제 앞에서 당황해한다.

삶에 있어 마음이 넉넉하여 이해득실에 초연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이다. 가끔은 숲속 그늘에서 시공을 초월한 자연을 만나 삶을 되돌아보며 지혜를 깨우치고 자연을 벗 삼는다면 바람직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정신이 감정과 자기 밖의 것에 현혹되어 물질과 명예 지위와 이득을 추구하는 욕심에 갇히게 되면 영혼은 빈곤해지고 영혼이 빈곤해지면 마음이 메말라진다. 마음을 비우면 삶의 비용이 줄고 삶의 비용이 줄면 마음은 여유로워진다. 삶의 설계를 조금이라도 비움으로 한다면 적은 노력으로도 인생은 풍성하고 넉넉해질 수 있다. 그늘에 들어가 몸도, 마음도 쉴 줄 아는 여유로 인해 마중 나온 행복을 기꺼이 맞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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