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문 음성군청소년상담복지센터.꿈드림 센터장

 
 

봄꽃이 완연하다. 코로나로 인해 움츠려 지내야만 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다가오는 꽃향기를 맡으며 산책을 하는 기쁨이 그저 감사하기만 하다. 하천가로 피어난 벚꽃은 화사함이 처연할 정도로 찬란하다. 하천가로 노니는 청둥오리는 겨울 철새로서의 여정을 포기하고 하천에 터를 잡은 듯하다.

하천 가까이 다가가도 청둥오리들은 놀라거나 달아나지 않는다. 물속으로 자맥질을 하며 먹잇감을 찾기에 골몰한 상태이다. 저 청둥오리도 한때는 수만 리 멀리 있는 길을 비상하며 무리를 이뤄 브이자 형태의 대형을 갖춰 군무를 선보였을 것이다.

하천의 청둥오리의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가 다시금 상기되는 것은 왜일까? 안데르센은 어느 여름날 귀족의 저택에 초대되어 넓은 정원을 거닐던 중 조용한 연못에 떠 있는 백조를 보면서 미운 오리 새끼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연못의 정원에서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백조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백조처럼 우아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화작가로 명성을 얻기 전까지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버지와 문맹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안데르센은 어려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마치 백조 새 끼가 오리 새끼보다도 더 볼품없이 물 위를 거니는 모습을 보면서 백조 새 끼를 주인공으로 미운 오리 새끼를 창작하게 되었다. 안데르센의 자전적 스토리를 가미하면서 창작한 미운 오리 새끼는 동화로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혹시 나는 백조임에도 불구하고 미운 오리 새끼로 사는 건 아닐까? 어쩌면 백조인데도 불구하고 오리 새끼로 착각한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닐는지? 본질적인 나와 평가 때문에 인식된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으로 진정한 참나로서 나를 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백조임에도 불구하고 미운 오리 새끼 틈바구니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무기력하게 자기 비난과 자책으로 미운 오리 새끼로 살아간다면 평생을 병리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백조처럼 우아한 날갯짓과 비상은 오리들에게 이상한 행동에 불과하다.

오리들 틈바구니에서 미운 오리 새끼인 백조는 애물단지에 구박 덩어리로서 놀림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르쳐주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방법은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는 것이다. 거울에 비춰보는 것은 자신의 의지이고 욕구이다. 물론 멘토를 통해 조언을 구하는 방법도 필요하다.

우리네 삶도 사회적 가면에 가려진 채 자신의 참모습을 잃어버린 채 사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본성적인 자기다움의 참나로서 살아갈 때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 양심에 거리낌 없이 욕망을 추구할 때 본질적인 나와 평가에 의해 인식된 나로서 일치하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발휘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맹자는 우리에게 본심을 찾으라고 경고한다. 닭이나 개가 집을 나가면 그것을 찾으려고 애를 써서 찾으면서 어째서 본심을 잃어버리면 찾을 줄 모르냐고 질타한다. 꽃잎이 지는 계절의 뜨락에서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라는 가시나무새를 들으며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별빛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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