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섭 인성교육칼럼니스트

 
 

설 명절은 간만에 온 가족이 모처럼 모두 모이는 즐거운 기간이다. 가족 간 안부를 묻고, 핏줄끼리 끈끈한 정을 나누는 날이다. 돌아가신 조상이나 살아계신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고 효를 행하기 위해서 덕담을 나누며 친교 행사를 하는 명절이다. 자신들이 마련해온 삶의 결실을 축하하고 또 그런 삶의 중요한 도움을 준 부모님과 조상에게 감사하기 위해 전해온 설 명절이 아닌가. 정말 지혜롭고 잘 전래된 것이 설 명절이다.

필자도 지난주에 어김없이 시골집에 설을 쇠러 갔었다. 늘 그래왔듯이 제일 먼저 집 안 구석구석을 한 바퀴 돌아 살펴보았다. 장독대로 걸음을 옮기던 나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하는 것이 있었다. 은빛 찬란한 스테인리스 사발이었다. 어린 시절 팔남매 숨바꼭질 장소로 쓰였던 장독대이다. 씨간장항아리 그 위에 늘 맑은 물이 찰랑이던 정화수사발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본 장독대 위에 엎어져 있는 정화수 사발은 나의 명치끝을 찡하게 자극하였다. 2년 전 돌아가신 노모님께서 어김없이 치성을 들이 시던 것이다. 봄, 여름, 가을에는 福자가 새겨져 있는 하얀 사기사발을 사용하는데 얼어 깨지니 겨울에는 스테인리스 사발로 바꾸곤 하셨었다.

팔 남매와 그 주렁주렁한 자손들의 복을 빌고 비신 흔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늘 그 자리에 놓여있던 정화수사발이었다. 그 정화수 사발의 비밀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1964년 청주로 기차 통학을 했던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야 했다. 첫 기차가 6시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에는 초승달이나 샛별이 떠 있을 때 일어나야 했다. 우연이 일찍 눈을 뜬 어느 날 장독대에서 중얼거리는 어머님 목소리를 들었다. 문살사이 유리판을 통해 장독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직 여명조차 어두운 겨울 새벽 살을 에는 추위에 어머님은 두 손을 합장하고 치성을 드리고 계셨다. 정화수는 샛별과 달빛을 먹은 해뜨기 전의 순수한 물을 의미한다. 엄동설한 추위 속에서도 이른 새벽 우물가에서 정화수를 길어 올리시던 그 정성으로 팔 남매를 길러내신 것이다. 언제나 어머님을 생각하면 명치끝이 시려온다.

나도 자식을 키운 부모지만, 나이가 들수록 어머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따라가기란 어림없다. 이미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님 생각에 늘 죄송할 따름이다. 석가의 말씀에 어머니가 자식을 열 달이나 뱃속에 품어 중병이나 걸린 듯하여 낳고, 낳는 달에도 어머니는 위태롭고 아버지는 두렵다. 그리고 피가 변해 젖이 되며, 자식이 즐거우면 기뻐하고, 근심에 싸이면 애가 탄다고 했다.

그런데 현 세태는 이런 부모님께 물질적으로만 봉양하여 효를 행하였다고 착각하는 자식들이 주변에 많음은 실로 안타깝다. 공자께서는 부모님을 공경하지 아니하고 봉양만 하는 것은 집에서 키우는 가축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 다 하였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려운 일이 아니니 행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권고하여 버릇을 들여야 한다. 부모님을 중심으로 가족이란 인간이 그 속에서 생명을 얻고 생명을 마무리 짓는 집단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비로소 인간다워진다. 가족은 인간이 인간답게 될 수 있는 이 지구상의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이 참된 가족의 의미를 설 명절에 다시금 되새겨 행복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특히 지금 살아계신 부모님에게는 도리를 다해야 한다.

조상님들, 부모님과 형제자매의 만남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가도 되돌아보고 더욱더 친밀한 사랑의 관계 형성을 위해 정성을 쏟는 기쁘고 즐거운 설 명절이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식어만 가고 각박해져만 가는 우리 사회와 사람들에게 정과 사랑이 넘쳐흐르고 서로 동족의식이 살아나려면 설명절의 본뜻을 살려 감사하는 마음을 살려내야 한다. 갈수록 부모와 자식 관계 단절, 형제애의 상실, 친척 관계마저 소원 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서 설 명절을 기회로 하여 살아계신 부모님을 찾아 섬기고 멀어져 가는 형제 우애를 다져야 한다.

우리 한민족이 수천 년 이어온 전통인 설 명절에 고향에 계시는 노부모님께 전화 한 통으로 안부나 묻고 자기 직계가족끼리만 해외여행이니, 자기 취미생활 기회로 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가 반만년 역사라고 하는데 반만년의 역사가 고작 남의 나라 것을 따라 하고 정작 지켜야 할 우리나라 전통문화나 풍습을 외면해서야 말이 되는가.

특히 돌아가신 조상들을 생각하는 마음 못지않게 지금 살아계신 고향을 지키시는 부모, 형제, 친척들에게도 도리를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 살아계신 노부모님을 위해서는 지극정성을 쏟고 기쁘게 해드리는 즐거운 설날이 되어야 한다. 송강 정철의 시조를 읊어 본다.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에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뿐인가 하노라. 효도의 길이 그리 어려운 것만이 아닐 진데!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