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화

 

한마을에 사는 열세명의 오십대들이 만났다. 같은 마을에 산다는 따뜻함에서였다. 단순히 모여서 얼굴을 보는 것이라면 마을에서도 충분히 어우러질 수 있겠지만, 하루만이라도 일상을 떠나서 우리들만의 호젓한 휴식을 갖자는 의도에서다.

 

얼굴에 그어지는 주름살과 흰머리를 잊고 서로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옛 얘기를 하면서 말이다. 어엿한 한가정의 마님 역할을 하는 모습은 미래의 생활을 위해 허리 휘는 줄도 모르고 하우스며 과수원을 부지런히 오갔던 덕이다. 또한 어려움을 잘 참고 부지런히 일해 오늘날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밖으로 들어나는 표정일 뿐이지 마음은 허전하고 변해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초조해지는 시기다. 자식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하며 재산 일굴 때는 모르던 외로움이 문득 문득 어깨를 두드린다.

 

남보다 더 똑똑한 자식을 갖기 위한 욕심으로 아이가 1등을 하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으니 잘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는 그러다 떨어지면 괜찮다고 하면서도 뒤떨어지는 것을 가슴 아파했던 어머니들이다. 그렇게 매몰차게 키워서 막상 시집을 보내려 할 때는 애틋한 편지를 쓰면서 울었던 여인들이 아닌가. 한사람씩 얼굴을 바라보니 지난 세월이 한 타래로 엮어지는 친근감이 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정다감했던 사람들이 생각나고 정을 나누며 좋은 이웃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바랑에 먹을거리 몇 개 집어넣고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탔다. 충주역에 차를 세웠다. 정동진을 향해 기차에 몸을 싣는다.

오늘 하루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바쁘게 마련해놓느라 정신없었을 모습이 역역하다. 그 와중에도 다듬고 다듬은 오십대들은 아랫배에 지방이 붙고 허리가 굵어 내가 보기에도 제법 안정감이 있는 편안한 몸매들이다.

 

차창 밖은 푸르고 마음은 넉넉하다. 저마다 한마디 하다보면 열차 안은 시끌시끌하다. 참다못한 앞좌석의 신사분이 어디 놀러 가는 가 본데 여기는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으니 조금만 조용히 해 달라고 한다. 대답은 잘도 하면서 소곤거리다 보면 웃음보가 함께 터진다. 미안한 감은 있지만 오랜만에 소녀들이 된 듯 감정의 통제가 되지 않는 눈치다.

 

세월은 무심히 가는데 몸이 늙어가는 우리는 눈앞에 들어오는 자연의 모습에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설레임과 환희뿐이다. 이 순간만은 아무 걱정도 없다. 나는 야유회를 약속한 전날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꼭 어릴 때 소풍을 가던 날의 마음이다. 하늘도 맑은 햇볕을 비춰주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남편이다. 잘 가고 있느냐는 목소리에 그의 존재가 새롭게 다가선다. 사실 우리가 가정을 떠나 기차를 탄 것은 단순한 놀이뿐만은 아니다. 멀리 떨어져서 가정이라는 숲을 다시 보고 그 숲의 큰 나무인 남편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는 속마음의 발로다.

함께 있을 때는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른다, 그래서 숲 전체를 보기 어렵다. 남편이라는 덩치 큰 나무를 하루 떨어져 본다. 적당한 권태와 적당한 애증이 뒤섞인 쉬지근한 오십대 부부들이 기대어 살다 보면 한그루의 나무는 보여도 숲 전체를 볼 수 없다.

 

차창 밖의 숲은 온통 푸르름이요, 너무나 큰 정원을 바라보노라면 마음 마저 꽉 차오르는 풍요로움이다. 산을 끼고 달리다 보면 골 깊숙한 곳에 안개가 자욱하다. 전날에 비가 온 탓에 골안개가 생긴 것이다. 하루 정도는 말개지지만 며칠 비온 탓에 많이 끼었다. 숲이 우거지면서 생긴 골안개를 보면서, 이렇게 비가 그친 후에 안개마저 우리를 환영하듯 햇살에 흩어진다.

 

철길을 잡아당겨 가면서 기차는 정동진에 도착했다. 푸른 하늘과 향긋한 풀내음에 비릿한 바다 냄새를 마시며, 모래사장에 소풍 나온 학생들 틈에서 마음 놓고 소리 질러본다. 지금은 철부지 같지만 돌아가면 서로 남편과 가정에 충실할 것을 생각하는 성실한 오십대로서의 마음을 가져 본다.

 

오늘 이렇게 마냥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을 영원한 우리의 덩치 큰 나무로 여길 것이며, 우리가 이렇게 잘 살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가족과 다른 이들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더 아름답게 늙어 가기 위하여 가끔 반란을 일으켜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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