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1975년 벌어진 인혁당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처형되던 날 태어난 어린 아기는 이제 만 32세가 되었을 테고 그 때 중학생이었다면 아마도 40대 중반에 접어들었을 것이니 오래 전 일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날의 끔찍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아직 살아 있다. 더욱이 그 처절했던 세월 지금은 기념관이 되어버린 서대문 구치소에서 함께 보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지금도 쓰라린 추억으로 남아있다.

 

미국 하원 도널드 프레이저는 당시 한국 정부의 인권탄압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던 Korea Committee 소속의 의원이었는데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이 미국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인혁당 사건에 대해 인권유린 이라고 항의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새벽 그 사건에 연루된 죄 없는 8명은 서대문 구치소 안에 마련되어 있던 교수대에서 한 사람씩 처형되어 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된지 18시간 만이었다고 한다.

 

억울한 사람 중의 한사람인 하재완은 정보부에서 조사받는 과정에 하도 매를 맞아 창자가 터졌다고 했다. 같은 사에 수감되어있던 김지하에게 호소하였다고 들었다. 피눈물이 날만한 억울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32년의 긴 세월이 흘렀는가. 그 때도 있었고 오늘도 있는 같은 대법원이 32년 뒤에는 그들은 무죄였다고 판결하였다니 처형된 사람들만 억울하구나. 창자가 터지도록 때려서 허위자백을 받아낸 남산 정보부 지하실의 그 때 그 사람들은 다 죽었는가 아니면 아직도 더러는 살아있는가. 사형을 최종 판결한 그 때 대법원장은 누구인가. 대법관들은 또한 어떤 사람들인가. 이제는 다 세상 떠나서 인혁당의 그 8사람들과 저승에서 어울리고 있는 것인가. 인생은 괴롭고도 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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