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렬 전 음성교육장

 
 

공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여 사람은 한정된 그릇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릇은 소망과 희망, 목표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자신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키우고 만들어 가야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자식이 스스로 자신의 그릇을 키우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농부는 농작물을 가꾸는데 온갖 정성을 쏟아 부으며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작물이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제 심은 씨앗을 오늘 파보고 뿌리가 돋아낫나 성급하게 살피지 않는다. 매일매일 씨앗을 파보고 뿌리가 돋아낫나 살핀다면 그 씨앗은 끝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죽고 말 것이다.

교육도 이러한 원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교육에서 성급한 지도는 무서운 독소가 되어 비교육적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많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청소년들은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 배우고 또 배워도 끝이 없는 게 지금 지구별에서의 청소년들의 모습이 아닌가. 그러다보니 맹목적이고 정신없이 공부하고 테스트하고 남보다 더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 우리 아이들은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다.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기위해라는 지표 없이, 억지로 주어진 대로 힘들게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그러다보니 포기도 생기고 좀처럼 학습 성과가 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한 명의 어린이를 건강하게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통째로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대로 우리 아이만 독야청청 온실의 화초처럼 키울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닌가.

농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한다. 그만큼 정성을 다하면 소담스러운 꽃으로, 탐스러운 열매로 보답해오는 것이 자연의 순리일진대 하물며 자식 농사야말로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크는 나무와 같다고 생각한다. 아직 무슨 꽃을 피울지, 무슨 열매를 맺을지 아무도 모른다. 부모의 욕심처럼 아이들을 키우려는 것은 온실 속의 분재처럼 성장을 왜곡시켜 만든 가짜의 나무에 불과하다. 제 각각 다른 아이들의 제 모습을 이해하고 격려해 줄 때 스스로 크는 나무로 튼실한 그들만의 삶의 열매를 키워낼 것이다.

이제 부모는 정비사가 아니라 정원사가 되어야 한다. 수리공처럼 아이를 고치고 바꾸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잘 자라도록 물을 주고 조심스럽게 가지를 쳐주는 정원사가 되어 아이의 잠재력을 발현시켜 주어야 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이 있다. 부모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자녀의 가슴에 한 알의 씨앗으로 떨어져 씨앗이 열매가 풍성한 나무로 자랄 수도 있고, 다른 나무의 성장을 가로막는 해로운 나무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녀의 꿈은 자녀의 꿈일 뿐이다. 부모가 그 꿈의 열매를 맛보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 자녀의 꿈은 부모가 대신 꾸어줄 수도 없다. 부모는 단지 자녀가 꿈을 찾아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면 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능력을 객관적인 틀이나 비교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아이들 스스로 그 부족함을 채워 나갈 수 있음을 믿고 기다려 주자.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 당당하게 우뚝 설 것이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