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수

나의 고향은 물 맑고 공기 좋는 충주시 산척면 영덕리 천등산 아래 둔대 마을 이다. 지금은 새마을사업과 특수작물 재배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마을 이지만 1960년대만 해도 토지는 척박하고 수리시설 미흡으로 보릿고개를 못 넘기는 전형적인 마을로 6021~70호쯤 되는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집은 할머니와 부모님 형제들을 모두 합해 8식구 정도 되는 보통 가정집으로, 아침은 깡 조밥 또는 꽁보리밥으로 적당히 때우고 저격은 멀건 칼국수 또는 고구마 감자 등으로 곡기를 간신히 해결하고 살았는데 그것도 많이 먹지를 못해 영양실조 상태이다.

이때 영양실조 해결 방안으로 가끔 가재잡이를 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마을 앞 하천은 청정지역으로 아주 맑은 물이 흐르고 가재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에는 검정 고무신, 흰 고무신을 많이 신었다. 다행히 식구가 많은 관계로 신다가 다 떨어지면 이것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이용하는 곳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전등 대신 등잔불을 켜고 지냈으니 늘 석유가 부족하여 가끔 소주병으로 산척 소재지에서 석유를 사다가 등잔불을 밝히다 보니 늘 석유가 부족한 상태이다. 그러나 당시 석유로 횃불을 만들 엄두도 못 내고 또한 손전등도 없는 시절이었을 때, 가재잡이로 이용할 대체 연료가 바로 잘 모아둔 떨어진 고무신짝들이다. 이 고무신은 다 아시겠지만 한번 불이 붙으면 잘 타고 오래가서 가재잡이 횃불로는 그만한 대체연료가 없었던 것이다.

저녁에 멀건 칼국수를 먹고 기다리다 밤 10시쯤 되면 온 동네가 캄캄한 밤이 된다. 이때 어머니와 형 그리고 나와 함께 마을 앞 하천으로 간 고무신 횃불을 높이 들고 돌을 들썩들썩하면 검은 알을 가뜩 품은 가재들이 구물구물 기어 나와 한 시간만 잡으면 양동이로 한 가득 씩 잡아 올 수가 있는데 그때 우리 집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늦은 밥까진 동네 사람들도 가재를 잡곤 하였다.

그날 밤은 행복한 밤이다. 다음날 아침 가재를 먹을 상상하니 그 아니 즐거운가? 지금의 영덕대게보다 월등히 맛있던 음식으로 생각된다, 잘 다듬어서 보글보글 끓는 된장푼 뚝베기에 가재를 넣으면 우리 오남매는 화로에 둘러 앉아 목을 빼고 군침을 삼키면서 잠시 후 먹을 가재를 생각하며 행복한 상상을 하곤 했다. 가재찌개 반찬 한가지만으로도 아침이 진수성찬 부럽지 않고 그날은 우리 오남매에게는 최고의 날이다. 지금도 그때 그 맛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나는 꽃게탕을 잘 먹지 않는 다. 그 옛날 없던 시절 먹고 자랐던 가재 맛과 비교하면 이것은 맛도 아니다. 가재로 영양보충을 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시절이 그립다. 생활은 좀 어렵더라도 맑은 일 급수 물과 오렴되지 않은 우리의 자연이 그립다. 더럽혀지지 않은 인간애도 무척 그립다. 하지만 , 우리 아이들이 나처럼 굶주린 물로 채우거나 고구마, 감자로 식사를 때우게 하고 싶지는 않다.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