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숙자 수필가

 
 

요즘 음성천변은 꽃양비귀가 황홀하다. 해거름에 나가보면 무릉도원이 따로 있을까 싶을 만큼 진귀한 광경을 만난다. 이 좋은 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이 주는 로또복권 당첨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도 나는 전에는 하지 않던 짓을 하며 꽃길을 간다. 무게가 부담스러워 집에 두고 다니던 스마트폰을 한손에 들고 집을 나서며 오늘은 어떤 횡재를 할까 생각하며 미리부터 싱글벙글이다. 아파트 후문을 나서면 개울 둔치 산책로 옆에 작은 양귀비꽃밭이 손짓을 한다. 평곡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하나 둘 걷기 운동하는 사람들이 합류한다.

우와! 왼쪽으로 펼쳐지는 꽃들의 장관은 말문을 닫게 한다. 혼자피어 아름다운 꽃이 양비귀꽃이라고 하나 무리지어 피는 꽃은 눈길을 압도한다. 사람들이 왁자하다. 혼자 묵묵히 걷는 사람도 있지만 가족들과 같이 나와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얼마쯤 가다 보면 <포토존>이라는 팻말이 보이고 사진 찍기 좋은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손마다 들려있는 스마트 폰, 꽃 속에 들어서 꽃처럼 웃는 얼굴들, 아이들도 뒤질세라 표정을 잡는다.

저만치 노인 한분이 천천히 걸어간다. 걷는다기보다는 꽃들과 대화를 나누듯 들여다보다 걷고 걷다가 또 들여다본다. 저 어르신도 꽃 같은 젊은 날을 살아왔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걸음이 불안정하고 눈동자마저 흐릿해졌지만 산업현장에서 온몸으로 뛴 산업역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옆으로 자전거부대가 씽씽 달리고, 아이들을 따라온 강아지도 꼬리를 저으며 천방지축이다.

우리 삶터 가까이 이런 꽃길이 들어선 것은 축복이다. 지난 가을 밭가에 줄을 매어놓고 ‘꽃씨를 뿌렸으니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을 본 기억이 있다. 무심히 지나 다녔다. 누가 가꾸는지 왜 가꾸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면서 누가 보거나 말거나 이 꽃을 가꾸었을 손길이, 그 마음이 바로 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나온 젊은 여인, 등에 업힌 아기가 좋아라 두 팔을 흔들며 까르르 웃고 있다. 아마도 그는 집에만 있는 노인이 딱해 바람을 쐬어주러 나온 며느리가 아닐까 싶다. 그 마음이 꽃이다. 유모차를 밀고 나온 노인,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표정도 꽃이고, 노부부가 천천히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꽃이다. 젊은 부부가 얼굴을 대고 사진을 찍는 모습도 꽃이고 이웃끼리 저녁산책을 나온 모습들도 다정한 꽃무리다.

저만치 낯익은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평소에는 덤덤히 지나치던 분들이 오늘은 두 손을 맞잡아주며 반긴다. 기분이 상승한 나는 청하지도 않는 그분들을 꽃 속에 세워놓고 찰칵 한방 날렸다. 비록 주름진 얼굴들이지만 양귀비꽃 속에 세워두니 그분들도 꽃이었다. 아마도 내 마음도 양귀비로 가득차서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서투른 카메라맨 말고 저쪽 나무 밑에는 완전 무장한 진짜 사진작가가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순간을 포착하는 중이다. 나는 좀 면구스러워서 목소리를 죽여 놓고 이 사진을 현상해서 드리겠다고 제풀에 선약을 해놓고 말았다. 내 말 끝에 한분이 “나 저 평촌 살아유,” 인증샷을 날렸다. 꼼짝없이 현상해서 이 꽃길에서 기다리다 선물을 해야 할 판이다.

꽃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 마음까지 화사하게 물들이는 저 요염한 진홍의 꽃, 가느다란 꽃대 위에 한 송이 받쳐 올리고 아리아리하게 웃는 저 미녀들, 중국의 4대 미녀 양귀비와 서시, 왕소군, 초선이 살아온 단들 이만 하겠는가.

“음성읍민 여러분, 꽃이 지기 전에 서둘러 음성천변으로 나오세요. 노부모님 모시고 천천히 걸으세요.” 확성기가 있으면 이렇게 방송을 하고 싶은 걸 참았다. 컴퓨터 게임에 빠진 자녀들에게 자연의 화면을 선사하면 게임중독에서도 벗어날 것이다. 또한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눈만 뜨면 들여다보는 스마트 폰에서 눈길을 돌려 바람 상큼한 꽃길로 나서보라. 다리는 걸어서 힘이 생기고 마음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평화를 얻을 것이다. 이 꽃길에 서면 자잘한 근심도 녹아서 미소가 되고 경제불안, 취업전쟁, 노후불안도 한순간이라는 넉넉한 희망이 스며들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라 하지만 꽃이 피어있는 지금을 붙잡아 즐기는 사람들이 진짜 부자가 아닐까 싶다.

나는 오늘 횡재를 했다. 안 걷다 걸으니 오금이 저렸지만 꽃길 끝에 아담한 벤치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바람과 꽃과 이웃과 내가 하나가 된 무량한 행복에 젖는다. 올해는 품바축제와 타이밍이 맞아 이중의 효과를 보고도 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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