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탔어. 엄마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푸념하셨다. 엄마는 오랜만에 청주로 나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동생에게 차가 생기고 나서 엄마가 어디에 갈 때면 늘 동생이 태워줬다. 동생 덕분에 우리는 시간에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동생에게 일이 생겨 엄마를 태워 드릴 수 없었다. 나의 운전 실력으로는 읍내까지가 한계다. 사실 그전까지 엄마와 나는 버스를 많이 탔다. 엄마는 예전을 생각하며 청주에 나가는 것쯤이야 버스로 충분히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버스 시간은 코로나 이후 더 줄어들었다. 그때는 사람이 자주 다닐 수 없었
시간만큼 빠른 것이 또 있을까. 엊그제 초등학생이었던 자식이 어느새 장성해 결혼을 하고, 까맣게 빛나던 내 머릿결도 희끗희끗하게 세고 있지 않던가. 거울에 비친 얼굴의 잔살을 보노라면 세월의 무상함이 무뜩무뜩 든다. 영국의 극작가 저지 버나드 쇼의 무덤에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글귀가 써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리라 가슴에 새겼던 마음도 부지불식간에 없어지는 순간이 허다했다. 그러니 매정하고 무서운 것이 시간보다 더한 것은 없지 싶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나 거북이 걷는
귀여운 그림을 작은 가위로 오린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칼 선 없는 스티커라 일일이 잘라줘야 한다. 몇 년 전부터 일기를 쓸 때 스티커를 붙인다. 처음 전단지를 오려 붙였다. 족발을 먹어서 족발 사진을 붙인 거 같은데 그 이후 스티커나 잡지 사진을 오려 일기에 붙였다. 그것을 다꾸라고 한다.언제부터인가 일기를 쓸 때면 일기의 내용보다 어떤 스티커나 사진을 오려 붙일지 고민한다. 그날 일상과 상관없을 때도 있다. 손이 가는 대로 할 때가 더 많다. 오히려 그날의 일상에 맞추어 사진이나 스티커를 찾게 되면 다꾸 시간은 더 오래 걸린다.
한동안 바둑에 심취한 때가 있었다. 핸드폰에 바둑채널을 깔아놓고 아침저녁으로 동영상을 보며 배우기도하고, 대국 게임도 하면서 자신감을 얻어 보려 했지만 승을 하는 것은 가뭄에 콩 나듯했고, 번번이 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사실 그렇게 바둑을 열심히 공부했던 이유는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었다. 자의반 타의반 우연찮게 들어간 바둑모임의 회원들은 모두 남자들뿐이었다. 모임의 회원들은 실력이 뛰어나 도 대회나 전국 대회에 참가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성 선수가 없던 차에 어설프지만 바둑의 기본을 안다 생각하셨는지 바둑협회회장님의 적극적인
그냥…. 지인의 질문에 또 그냥이라고 말했다. 우리 앞으로 그냥이라고 말하면 500원씩 내기해요. 지인이 말했다. 그럼, 만 원 내고 시작하면 안 될까요?말투뿐만이라 문장도 마찬가지였다. 지인과 나는 인터넷으로 매주 온라인으로 글 쓰는 모임을 한다. 서로 자신의 글을 가져와 합평하는데 게으른 나는 겨우 만들어 온다. 어디에도 내놓기 부끄러운 글이지만 지인과의 약속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한 줄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그냥이라는 단어를 다 지워봐요. 지인이 말했다. 그냥이라는 단어는 애매해요.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갔다.
까악까악. 화장실에서 이를 닦는데 아침부터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생각부터 들었지만 별일 아니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까마귀를 행운의 징조라고 여길 것. 나는 까마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억지로 의미를 부여한다. 나의 까마귀 징크스는 역사는 깊다.학창 시절부터 나는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버스는 7시 40분 차. 이 버스를 놓치면 무조건 지각이다. 그때는 지각이 제일 무서웠다. 이 버스를 타기 위해 매일 달렸다. 미리 준비하고 집을 나서기에는 나는 아침 잠이 많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버스 시간은 7시 40분 차지만
이곳보다 하루해가 짧은 곳이 또 있을까? 음성은 소도시로 농업이 주 소득원이다. 그러니 봄부터 가을까지 이곳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농한기인 겨울에도 이곳은 바쁘다. 음성군에서는 군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펼치고 있다. 농사를 지으시느라 힘드실 텐데도 여러 기관에서 마련하고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분들이 많다. 음성이 활기찬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곳은 축제가 많이 열린다. 사람들의 열정은 축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축제는 군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 없이는 치룰 수가
긴 연휴 동안 이불 밖을 나가지 않았다. 이불 밖을 나가지 않으면 그저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안 한다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불 속 세계는 현실 세계만큼 매우 바쁘게 돌아간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동영상도 시청한다. 가끔 라디오도 듣는다. 당연히 잠도 잔다. 이불을 뒤척이며 앞으로의 미래도 생각한다. 과거의 수치도 떠올리며 인생을 이렇게 낭비해도 되는 걸까, 비참해져 갈 때 동생이 세차장에 간다고 하기에 따라나섰다. 지금의 장소를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벗어날 기회가 없으면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동생이 세차하는 동안 근처 천변을 걸
어느새 길은 후미부근이다. 이리도 심심할 수가 없다. 울퉁불퉁 했어도 예전에는 이 길이 참 정다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낚시꾼들에게는 믿음을 주는 곳인가 보다. 심심찮게 낚시꾼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도 어느새 편리함과 깨끗함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구불구불한 길에서 위안을 삼아야 할까. 음성은 유난히도 저수지가 많기로 유명하다. 마을마다 저수지를 한 두 개씩은 품고 있는 곳이 음성이다. 그래서인지 홍수도 가뭄도 비껴간다. 오늘은 육령리 저수지를 찾아 왔다. 음성읍을 벗어나 금왕으로 들어서는 경계에 있는 저수지다. 육령리 저수지는 삼형제
언제부터 ‘기분상해죄’는 일상이 되었다. 주문한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별점으로 응징하고 자신의 아이 기분을 나쁘게 했다는 이유로 아동학대로 신고하고 친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민원을 넣는다. 법보다 기분이 먼저다. 내 기분을 위해 법을 어기고 내 기분을 위해 가짜 뉴스를 만든다. 그래서 누군가 바른말을 하면 내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까 상대에게 모욕감을 준다. 문제는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 여긴다. 그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 되잖아.나 역시 그런 사람들의 부류였다. 약간의 과대망상도 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날은 왠지 그곳을 오르고 싶다. 날이 좋은 날이라면 음성의 먼 곳까지 훤히 볼 수 있는 그곳은 음성에서 가장 높은 산인 가섭산에 자리한 천년 고찰 가섭사다. 가섭산은 해발고도 약 700여 미터에 달하는 산이다. 그 중 가섭사는 600고지에 자리해 음성의 풍광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사찰이 워낙 높은 지대다 보니 어느 날에는 구름이 절보다 밑에 있어 신선이 된 듯 착각이 들기도 한다. 불교 신자임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절을 잘 찾지는 않는다. 마음이 신산할 때나, 초파일에만 찾는 게 고작이다.
들깨 모판을 든 손이 점점 묵직해 온다. 장화를 신은 발목도 저려온다. 우리 집은 들깨를 심을 때 비닐을 씌우지 않고 두둑 가운데에 들깨를 심는다. 아빠가 막대기로 구멍을 뚫으면 엄마와 나 동생은 구멍 속에다 들깨모를 집어넣고 발로 꾹 누른다. 남들이 보기에는 저렇게 해도 들깨모가 자라나 싶을지 의문스럽겠지만 우리 집은 몇 년째 이런 방법으로 들깨를 심는다. 허리도 많이 굽히지 않아서 앉아서 심을 때 보다 낫다. 하지만 이것도 땅이 고르고 들깨모가 구멍에 잘 들어갈 때 이야기다.지금 심는 밭은 흙을 받아서 만든 밭이라 돌도 많고 흙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조금 전 학교에서 누가 더 멋진 다이빙을 할 것인가 겨루자고 했던 터였다. 남자 녀석들 틈에서 의지가 불타오르는 듯 비장한 표정의 여자 아이도 한 명 끼어 있었다. 드디어 동네 입구에서 만나는 큰 다리 앞에 다다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자 녀석들은 윗옷을 훌훌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옷을 입은 채로 뛰어내릴 여자 아이는 다리 밑을 뚫어져라 볼 뿐 말이 없었다. 제일 먼저 다리 난간에 올라선 아이는 큰 키에 다부진 몸을 자랑하는 힘 꽤나 쓰는 Y였다. “풍덩”, 뒤이어 다른
대한민국 사회에서 입양은 비밀이고 숨겨야 하는 가족의 비극 정도로 여기는 편견적 사회 인식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편견은 사실 조상 때부터 전래된 전통 사상이 아님을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된다. 오히려 한민족은 대대로 입양을 장려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이래로 나라의 탄생 설화나 전래 동화에 입양이 자주 등장함은 이 때문이다. 심지어 삼한 시대의 주몽, 박혁거세 등의 탄생 설화에서는 입양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한민족은 입양에 관대한 사회 분위기는 가문의 번영뿐 아니라 아동 양육의 권리
정신을 차려보니 살이 확 쪄 있었다. 원래 살에 연연해 하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무관심하다. 옷도 항상 편한 옷만 입어서 살이 찌는 것에 신경은 쓰지 않는다. 살이 찌면 더 큰 옷을 입으면 된다.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먹으면 자주 체하기 시작했다. 약도 잘 듣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운동을 해야했다. 소화를 시켜야 했다. 농사일 돕는 나는 운동을 정말 싫어한다. 농사라는 게 밖에서 움직이는 동작이 많으므로 집에서는 최대한 움츠리며 에너지를 보충한다. 땀을 흘린 만큼 살이 빠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농
중학생이었던 그때 학교 가는 길은 그리 수나롭지가 않았다. 1980년대 초, 지금처럼 길도 시원하게 뚫리지도 않아서 학교를 가려면 논과 내를 건너야 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은 질척질척한 흙길에 신발이나 옷이 엉망이 되기 일쑤다. 그러니 비가 오는 날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오성동은 음성여중을 가는 길목에 있던 동네였다. 그 동네는 우리 마을 학생
그동안 미루었던 스티커 정리를 하는 중이다. 내 취미는 다이어리 꾸미기다. 일명 다꾸. 다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이 세계에도 다양한 주제가 있다는 걸 몰랐다. 나는 그때그때 기분마다 다른 다꾸를 하는데 최근에 빠진 건 소녀 그림의 캐릭터 스티커 다꾸다. 예쁜 스티커를 보면 기분이 좋다. 그래서 사고 본다. 마치 책을 사는 것과 같다. 사야 낫는 병이다. 문
봄비가 내리는 아침, 마음이 부산해 졌다. 뜨거운 커피와 물을 보온병에 담고 컵라면도 챙겼다. 그리고 지인에게 전화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받는다. 비만 오면 약속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렇게 마음이 동한다. 어느 누군가는 참 청승맞다고도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라야 느낄 수 있는 순간을 놓칠 수는 없다. 겨울 동안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봄이 오길
아직 공기가 찬 어느 봄날이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데 초등학생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들어왔다. 남자아이 2명, 여자아이 4명. 아이들은 제각기 음료를 주문했다. 초등학생 아이들끼리 카페라니,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시절(당시는 국민학교)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내가 처음 카페에 갔을 때가 스무 살쯤이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읍내에는 카페가 없었다
한 도시를 상징하는 것은 많다. 특산물이나, 축제, 음식, 또는 건물이 되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 음성을 상징하는 것을 꼽으라하면 단연 ‘음성 문화예술회관’이 될 것이다. 음성읍의 외곽에 자리한 음성 문화예술회관은 타지 사람들에게 좀 의아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렇게 작은 소도시에 웅장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문화예술회관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