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현 대소면장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던 시절에 고등학생.대학생을 대상으로 단체훈련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연마하며 민족의식을 고양함으로써 애국적 단결심을 갖추게 하려고 각 급 학교에 조직 되었던 단체로써 국가를 위하 헌신봉사 정신을 배양을 목적으로 하는 자치훈련단체가 있었다.

-1975년 3월 제2땅굴이 발견되고 4월 베트남 패망과 때를 같이 하여 자주국방.총력안보라는 기치 아래 1975년 7월까지 전국적으로 각 학교에 학생회를 해체하고, 9월 2일 서울에서 중앙학도호국 단발단식이 거행되고 전국고등학교 및 대학에 학도호국단을 설치 ‘85년 까지 운영하게 된다.

-남북대결의 상황에 적응하는 교육을 위한 방편으로 반공교육을 하고, 연구.수양.단련.단체작업 등을 통해 투철한 민족의식과 국가관의 확립을 지향했다. [싸우면서, 배우자!]는 구호 아래 구체적인 지도방안으로는 시국강연회.체조.교련.행군 산악훈련 등을 통한 체력단련, 향토방위훈련, 근로 봉사 등이 있었다.

-학도호국단은 학생자치단체인데도, 군사적 칭호를 부여받았는데, 학생회간부는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이었고, 학생들은 학로로 칭했다. 활동 범위는 교련교육, 반공 강연회, 행군, 산악훈련 등이 있는데, 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세대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교련의 악몽: “시선은 적의 눈을 응시하라. 총검은 적의 인후부나 목을 노려라. 과감하게 공격하라. 찌르는 순간 총검을 회전하여 일격에 적을 제압하라.” 총검술 16계 동작 중 찌르기를 설명한 내용이다.

- ‘교련’이라 불렸던 학생 군사훈련 과정 중에서 총검술은 가장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과목 이었다. 교련 시간에는 찌르기, 베기. 개머리판으로 치기 등의 살상 동작을 셀 수 없이 반복 해야 했고 급우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동작이 틀리면 어김없이 전체 학생이 몽둥이세례를 받아야 했다.

- 각 학교에는 주위를 철조망으로 빙 둘러친 자체 무기고가 있었고, 그 안에는 격발장치가 제거된 M1총, 카빈총, 플라스틱 총, 목총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진짜 소총은 고학년들이 분해 조립과 실기대회지참 등 극히 아꼈고, 플라스틱 모형 총은 총검술 연마 사용하였으며, 모조품 목총은 주로 저학년의 훈련용으로 사용했었다.

- 반복되는 높은 포복과 낮은 포복으로 무릎과 팔꿈치에는 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을 정도였고 제식훈련 중 빈혈과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일은 다반사였다. 대신 졸업 후 군대에 입대하면 그동안 기초 군사훈련을 예습한 덕분에 편하게 넘어간 기억은 있다.

-교련 교육은 기존의 시간표에 편성된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당시 각 시도 교육청은 ‘교련 실기대회’라는 것을 개최하였는데 유신하게 여길 만큼 오랜 시간을 준비해야만 했다. 실기 대회에는 각 학교의 대표들이 출전하여 총검술을 비롯한 포복 제식훈련 등을 겨루는데, 남학생들은 제식 훈련과 총검술을 선보이고 여학생들은 흙먼지를 나는 운동장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시연을 보였었다.

실기를 겨루는 것은 2학년생이 전담했고 1학년생들은 응원부대로서 관중석에서 ‘반공’이나 ‘멸공’같은 카드섹션을 연출하거나 선배들의 뒤치다꺼리를 맡아 했다.

-교련복은 중학교 학생과 고등학교 학생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 점이었다. 상.하의 얼룩무늬교련복에 허리띠와 각반을 착용하고 교모의 턱걸이를 내려서 턱에 걸면 영락없이 “학도의 용군” 모습이다.

교련복은 당시의시대상으로 볼 때 학생의 신분과 군인 신분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복장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교련복을 아무런 생각 없이 입고 다녔고 일체의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반쯤은 국가의 간성(干城)이 되었다는 생각에서 뿌듯한 기분이 되기까지 했다.

-당시 실기대회에는 지역별로 고교가 모여 운동장에서는 교련 실기를 , 관중석에서는 카드섹션을 겨루었는데 정상적인 학업일정을 무시하고 오전 수업을 마친 뒤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하는 파행적인 교육이 계속되었지만, 당시는 누구도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기 않았다.(당연시)

- 교련교사는 학교의 규모에 따라서 위관급과 영관급(대학교)예비교역장교가 임명이 되는데 학교에서는 늘 군복과 군화를 착용하고 현역계급장을 달고 가끔 행사 때에는 훈장을 달고서 으스대기도 하며 수업시간에는 월남전 참전 무용담이나 낙하산 훈련 등을 들려주기도 했고, 근엄한 모습으로 학생들의 군기 점검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교련교사의 계급을 보면 그 학교의 규모를 짐작할 수이면서 전역군인들의 좋은 직업 대상 군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미래를 위한 꿈을 키우기에 앞서 적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살상훈련을 받게 하는 나라!

인생의 소중한 꿈을 키워나가야 할 청소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는 군사훈련을 교과목에 당당히 끼워 넣고, 드러내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뿌듯해하는 나라!

반공교육은 초등학생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서, 공산당은 피부가 빨개서“빨갱이” 인 줄 믿는 나라, 내가 살아온 70년대 자유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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