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심

내 유년은 가난한 시절이었다. 봄이면 빈 땅이 없을 정도로 농부들이 씨앗을 뿌렸다. 새소리 드맑은 청명한 날에 농부들의 ‘이랴,이랴’하는 소리가 들판에 가득했다. 아이들은 버들가지로 피리를 만들어 불고, 동네 우물터나 빨래터에 방망이소리 따라 아낙네들의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그때는 봄부터 보리 이삭이 익을 때까지가 가장 힘겨운 시기였다.

그래서 보릿고개라는 말도 나왔을 것이다. 가나한 집에서는 동네 제삿날이나 잔치가 있으면 내 집에 경사라고 있는 것처럼 일을 도와주는 등 며칠씩 들뜬 기분이었다.

그렇게 가난한 시절에 내 친정집은 부유했던 것 같다. 모내는 날이면 다섯 동네가 명절이 되었다. 지금은 꽁치가 값싸고 흔한 생선 이지만 그대는 귀했다. 작은 아버지는 모내는 전날 읍내장터에 가서 꽁치를 몇 궤짝씩 사오셨다. 아침 일찍부터 동네 여인들이 모여 잔칫집일 하듯이 음식 준비를 하여, 광주리나 동이에 이고 줄로 서서 나가 논 옆 야산에 점심을 차렸다. 할머니는 모내러온 일꾼들을 비롯하여 점심시간에 모인 사람들에게 양념으로 조린 꽁치를 접시대신 떡갈나무 잎에 싸서 앞앞이 나누어 주었다. 접시가 흔치않던 시절이기도 했으나 큰 그릇에 한 타령으로 차별하지 않는 배려였다. 비록 꽁치 한두 마리이지만 1년을 가야 비린 음식 구경하기도 어려운 그들에겐 최고의 성찬이었다. 배고파보았던 할머니가 굶주리는 이웃에게 보냈던 따뜻한 마음으로 해석된다.

옛 어른들이 도토리를 주우며 하시는 말씀을 들을라치면. 산중턱에선 상수리나무가 들판을 내려다보다가 흉년이 들을라치면 서둘러 열매를 많이 맺는단다.

가난한 백성이 도토리라고 먹고 연명하라는 자연의 말없는 보시이리라.

이웃에 내 또래 친구가 있어 자주 놀러 다녔었다. 겨울이면 조그만 이불하나를 아랫목에 펴놓고 온 식구가 누어 발을 디밀고자 는 것을 보았다. 그 집에 가면 개떡이라는 것과 밀범벅이 맛있어 보였다. 수줍음이 많은 나는 주어도 싫다고 했으면서, 그들이 먹어보라는 말을 안 하면 속으로 섭섭했다.

어는 추운 겨울 날 친구 어머니는 남편도 없는 집에서 아기를 낳았다. 첫국밥조차 끊여 먹을 것이 없을 만큼 가난했다. 할머니는 미역 한 오리와 쌀을 바가지에 담아 사립문으로 디밀어주며 “애기엄마, 미역과 쌀을 놓고 가니 첫국밥 끊여 먹우”. 하고는 집으로 오셨다.

할머니는 그 이상은 주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할머니는 아기 낳는 집에 언제나 그 정도였다. 지금 같으면 내가 몰래 많이 퍼다 주었을 텐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친정이 부자였는데 무남독녀에다 조실부모하여 가난한 선비인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와서 ‘허리띠로 양식을 삼고 허리띠 기운으로 살았다.’고 했다. 친정에게 도움 받은 몫은 논밭을 장만하는데 쓰고, 굶어가며 일해 온 알뜰하기로 이름 나있는 억척여성이었다. 자식들을 키우는 동안에도 해마다 땅을 사모아, 동네에서 새부자가 났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우리 땅을 밟지 않으면 다닐 수 없다고 까지 했다. 창고에 쌀가마니를 쌓아놓고 살면서도 늘 아끼는 마음이 있어 며느리에게 마음 놓고 먹게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정도껏 하고 많이 베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객지 생활을 하셨기에 친정집의 주권은 할머니와 작은 아버지에게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아기를 낳으면 미역 한 오리와 쌀 한바가지를 주시는 것은 할머니 몫이었고, 추석 때와 섣달그믐께 떡쌀과 소고기를 두 근씩을 나누어주는 것은 작은아버지 몫이었다.

가끔 할머니와 작은아버지의 삶은 떠올려본다. 나눈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실천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가난했던 시절 어른들의 나눔의 삶은 내 인생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도 내 식구만 위하는 삶보다는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보시를 하며 사는 삶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해주곤 한다. 아이들은 나도 모르게 각각 통장에서 보내는 데가 있다고 했다. 앞으로 생활이 나아지면 좋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저희들의 꿈이라고 한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추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떡갈나무 잎에 싸 주던 꽁치의 정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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