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영 전 청주고 교장,칼럼니스트

 
 
오래전에 제주에서 페리호를 타고 완도항에 입항했다. 활짝 핀 꽃들이 반갑게 상춘인파를 맞았다. 완도는 내게는 별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다.

 예조참판을 지내신 고조부께서는 완도군수로 초임관 시절을 보냈고 선정을 베푸시어 백성들이 송덕비와 융무정이란 정자를 세워 그 공덕을 추모했고(名官篇), 사천현감을 지내신 증조부께서는 한일합방 후 10일불식(十日不食)하시어 자절(自絶)하셨다(節義篇)고 음성군지(陰城郡誌)에 전해지고 있다.

 신라시대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로 이곳 완도를 거점으로 해상왕국을 세워 국위를? 선양한 사실이 떠오른다. 버스를 갈아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지나치는 풍경들은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란 노산 이은상의 시을 떠올리게 했다. 차창밖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강산이 세 번 바뀔 세월을 출람지예(出藍之譽)를 보람으로 인사(人師)의 길을 걷겠다고 앞만 보고 달려 왔건만 되돌아보니 남긴 것 하나 없는 부끄러운 세월이었다.

 교사는 학생들의 사표(師表)요, 동일시(同一視)대상으로 학생들은 교사의 언행은 물론 걸음걸이 글씨체까지도 닮아간다. 서산대사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수심자 부자굴 부자고(修心者 不自屈 不自高)라고 했고, 논어(論語)에 긍지부쟁(矜而不爭)이라고 했다. 결코 비굴하지도 자만하지도 않은 자세로 긍지를 갖되 다투지 않고 의연(毅然)하게 살아가리라.

  청주고에 교사로 재직했던 시절의 제자가 찾아와 담소할 기회가 있었다. 재학시절 선생님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노라고 했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청소년기에 갈등을 느끼고 고민하는 제자에게 꿈을 심어주고 조상에게 누(累)를 끼치지 않는 공직자가 되도록 노력하리라 다짐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