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호 시인

봄이다. 겨울을 배겨낸 생물이 앞 다투어 싹을 틔우고 있다.

나무들도 제각각 물이 오르는 게 한파를 이겨낸 개선장군 같이 씩씩해 보인다.

버드나무가 물이 오르는 것도 그 즈음이다.

가지를 꺾어 비틀면 껍질과 대가 분리되는데 그 껍질이 일명 호드기라고 하는 버들피리가 된다.

여타 나무보다 물기가 많아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에 피리가 되는 영예보다 그것을 이용해서 악기를 만들던 형님이 더 기억에 남아 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큰형님 또래의 친구들이 자주 놀러 왔다.

와서는 주로 하모니카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퉁소와 피리를 불기도 하였지만 극히 드물었고 기타를 치거나 하모니카를 불곤 했다.

하모니카는 값이 싼 편이라 다들 가지고 있었지만 기타는 한 대였는데, 그것이 명품이라고 하는 세고비아 기타였고 바로 그 하나로 돌려가며 배웠다.

차례를 기다리자니 감질이 났을 테지만 가난한 시골 청년들은 누구도 거금을 들여 구입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결국 큰 형님은 궁리 끝에 기타를 만들기로 했다.

울림통은 베니어판만 있으면 충분했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네크와 플랫이 문제였는지 그것에 고심했다.

플랫은 17개이고 네크는 6줄이 당겨야 되는 목 부분으로, 팽팽히 당길 때의 힘은 인장력이 무려 1톤이나 되기 때문에 조건이라면 휘어지지 않아야 했다.

어깨 끈은 있다 해도 들고 치기에는 무겁기 때문에 가벼운 재료를 이용해야 되는 게 문제였다.

결국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나무를 네크로 써야 되는 결론이 나오는데 무슨 생각인지 형은 버드나무를 택하였다.

언뜻 생각하기에 단단하려면 무거워야 할 것 같고 반대의 경우 가볍기는 해도 쉬 부서질 테니, 버드나무는 어쩐지 적당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버드나무를 택한 형님의 뚱딴지같은 발상은 불에 강한 물과 물에 약한 불의 조화를 염두에 둔 것이다.

무른 것에 불을 가하면 단단해지고 단단한 것에 불을 가하면 오히려 물러진다.

습지에서 자라 흐물흐물한 버섯이 열을 가하거나 말라가면서 곧장 딱딱해지는 원리야말로, 툭하면 물러지는 버섯을 이듬해까지 저장할 수 있는 근원이다.

무른 것이 불을 가하면 단단해지듯 단단한 것에 불을 가하면 물러진다.

쇠붙이를 달구어 두들기면 자유자재로 구부리고 펼 수가 있지 않은가.

바로 그 이치를 생각한 형님은 네크로는 무르디 무른 버드나무를 쓰고 플랫을 만들 때는 강한 쇠로 된 젓갈을 택했던 것이다.

미풍에도 흐느적거리는 수양버드나무, 얼마나 약한 나무이면 어린아이들이 손쉽게 꺾어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었겠는가.

그런데도 마르기만 하면 유달리 단단한 까닭에 기타 줄을 매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네크는 해결이 되었고 다음에는 쇠로 된 플랫이다. 마땅한 쇠붙이를 찾지 못한 형님은 놋젓가락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자꾸만 계속되자 어머니는 젓가락이 없어진다고 했다.

좀도둑이 드나 하면서도 그것만 훔쳐갈 리가 없다고 샘가의 뜨물통과 구정물통 바닥을 휘젓는 게 일이었다.

아무튼 형님은 기타를 만드는 데 날밤을 새웠다.

잘라온 버드나무를 대패로 밀어 빤빤하게 하고 젓가락을 줄로 잘라 숯불에 담금질을 하기도 하면서 분주한 날을 보냈다.

단번에 마음에 드는 걸 만들 수는 없는지 몇 개를 버린 끝에 조금은 만족할 만한 악기를 만들었는가 싶었다.

17개의 플랫을 만들기 위해 훔쳐낸 놋젓가락은 얼마나 될지 모를 일이다.

버드나무 역시 수차례 결딴이 났다 해도 자라기 때문에 걱정은 덜했으나 악기가 귀했던 시절 특이한 방법으로 기타를 만들어낸 형님은 어린 마음에도 위대하게만 보였다.

이후 형님의 친구들은 기타를 만드느라고 법석을 떨었다.

형님이 만든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도 있고 더러는 자기 고집대로 만들기도 했지만 버드나무와 놋젓가락을 쓰는 방법은 다들 같았다.

열세 분의 어머니들도 우리 집처럼 영문도 모르고 없어진 놋젓가락 타령을 했을 테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무튼 그해 겨울은 버드나무의 수난기였다.

어릴 때 둑을 따라 가면 버드나무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베어낸다 해도 냇가에서 돌 하나 들어내는 정도였겠지만 형님의 친구들 열세 명이 죄다 만드느라고 적어도 30그루는 결딴났을 것이다.

악기가 만들어진 후 형님의 똥패들은 더 자주 모였다.

밤마다 이 집 저 집을 순회하며 기타를 배우는데 주로 우리 집에 모였다.

배운다는 과정이 어린 내게는 또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도레미파솔이라고 하는 음계 대신 우스꽝스러운 가사를 읊으면서 배우기 때문이었다.

“똥 누러 갔다.

삐약 삐약.

똥두깐에 빠졌는가.

삐약 삐약” 하며 계이름을 외는 게 아니라 말소리로 음을 외던 큰 형님.

“뚱따디 땄따. 따띠리 딧디 딴따”

지금도 “콩나물 대가리를 외기가 힘들다”며 장난스럽게 가사를 붙여 부르던 형님의 콧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다.

물과 불의 이치를 응용해서 만들어 치던 기타소리는 음악의 경지를 뛰어넘은 철학의 선율이다.

버드나무와 놋젓가락 하나에도 빠뜨림 없이 깃든 섭리를, 형님과 함께 나이가 들면서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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