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심 | 劉南心

 계단 폭포가 시원해 보이는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집안 조카의 결혼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날의 주인공을 확인하고 손님맞이에 바쁜 신랑얼굴에 눈도장 한번 찍으면 달려가던 뷔페식 식당이 아니라 조금은 당황스럽다.

이런 것이 호텔식 결혼이구나 하면서 촌스러움을 감춘 채 상기되어가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위축되어지는 자신을 느낀다. 초대받은 손님들도 급이 다른 것 같다. 화려한 듯 차분한 식장 분위기도 너무나 세련되었다. 간간히 아는 친지들과 눈인사를 나누는데 왜이리 배가 고픈지 뱃속에서는 연신 신호가 온다.결혼식 후 성찬이 나올 때까지 참았다간 계속 물만 먹힐게 뻔하다. 잠깐이라도 혀끝을 달래 줄 요깃거리를 찾아 살며시 식장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강남의 높은 빌딩그늘이 높아서인지 배고픈 학생들의 안식처인 분식점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금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잡고 빙글거리는 회전문 사이로 들어서니 오른쪽 귀퉁이에 피자가게가 보인다.한 판 사서 어머니, 남편 아주버님 큰집 형님등 여러 친척들과 한쪽씩 먹으면 좋겠지만 남의 집 잔치에 결례인 것 같아 예식장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떡이다.

고깔모자처럼 폼 나게 자리 잡은 냅킨사이에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는 떡, 네모난 보석 상자처럼 금빛 스티커가 입구를 봉하고 있었지만 한 겹 두 겹의 포장지를 뜯어내자 양초 모양, 꽃모양 ,케이크 모양의 예쁜 떡이 나란히 들어있었다. 순간 너무 예뻐서 먹는 음식이 맞을까 싶어 살짝 포크로 건드려본다.

말랑말랑 움찔거리던 것이 봉긋 튀어나오며 바로 제 모양을 살린다. 틀림없이 쫀득쫀득한 찰떡이다. 애피타이저로 세팅해 둔 그림 같은 떡 한입의 호사를 온 몸으로 느낀다. 혼자 먹기가 민망해 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지 분들께도 권해드렸다.

그렇게 약간의 허기를 달래고 평정을 찾은 후 식이 시작되었다. S대를 졸업하고 미국의 스텐포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28살의 잘나가는 조카와 그의 신부는 대학 때부터 사귄 캠퍼스커플로 역시 스텐포드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중이란다. 그래서 그들의 대학시절 지도교수였던 은사님의 주례로 식이 진행되었다.

서로가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원숙한 삶을 이루어가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면서 특히 남자는 천사와 결혼하는 게 아니며 여자는 천사가 아니라는 걸 강조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결혼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남녀가 동등한 인격체임을 힘주어 주지시키는 까닭은 하얀 드레스에 눈부시도록 예쁘기까지 한 신부가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재원이어서 일까?

인간은 자신의 반쪽을 찾아 삼십년을 헤매지만 그렇게 찾아 헤맨 반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삼십년을 몸부림치는 게 요즘 위기가정의 모습이라고, 서로가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 떠 받들어주면서 돕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로 식이 끝날 때쯤 연어샐러드를 시작으로 스테이크 정식이 제공되었다.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척들과 식사를 하면서 오늘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근황에 대한 안부를 묻는다. 대부분 성장한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다.

자식 키워봐야 남이라고 저렇게 잘난 아들과 며느리 손에 몇 번이나 밥상을 받아보겠느냐는…오늘의 신랑과 신부는 미국에 신접살림을 차린단다. 신랑은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좋은 회사에 취직이 되어 그곳에 정착할거란다.

그래서 잘난 아들을 둔 오늘의 혼주는 장가보내 달라고 서두르는 자식이 밉더라고 속상해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큰 누님이“아들 잘 키워 봐야 며느리 좋은 일시키는 거야” “그림의 떡이라니까”하면서 씁쓸한 위로를 건넨다.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시어머님도 막내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그곳에서 배필을 만나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산지 10여년 일 년에 한번, 얼굴보기가 쉽지 않은 탓에 하루는 전화를 걸어 한나절이나 욕을 해 댔다고 하신다. 보고 싶고 허무한 마음의 표현이시리라. 공들여 키운 딸이, 공부 잘하고 영특해서 어머님의 자랑이었던 막내가 그림의 떡이었다고. 그래서 나머지 자식들은 곁에 두고 싶으신 걸까?

매주 서울을 오르락 거리는 나는 솔직히 불만이 많다. 오늘도 음성에서 바로 예식장으로 가면 간단할 일이다. 길에서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예식장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속마음을 감춘 채 우리는 서울을 빙빙 돌면서 어머니를 받들어 준다.

예식장에서 돌아온 저녁에는 손위 시누이가족과 9시가 되어야 퇴근하는 동서네 식구를 기다렸다가 24시간 문을 여는 식당에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었다. 매번 늦게 끝나는 동서 네를 빼고 일찍 저녁을 먹자는 말도 꿀꺽 삼켰다.

입안의 찰떡같은 자식의 역할이 고달프더라도 어찌할 것인가? 맏이로 태어난 남자와 결혼한 것을, 그래도 이렇게 살다보면 커가는 내 아이들이 보고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오늘도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께 드릴 용돈을 봉투에 넣는다. 그림의 떡이 될지라도 맛 좋고 빛깔 고운 떡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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