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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카이에서박명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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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02  13: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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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여행길에 올랐다. 올해는 우리가 결혼한 지 40년이 되는 해고 내 갑년이기도 하다. 멀게만 느껴지던 노년이 코앞으로 다가온 듯해 생각이 깊어진다. 또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걸어온 길 위에서 앞에 놓인 낯선 곳을 향하는 마음에는 두려움과 희망이 공존하고 있다.

봄의 길목 며칠째 초미세 먼지로 인해 하늘은 회색빛이다. 호흡기기관에 민감한 남편을 위해 파란 하늘을 그리며 회갑 여행지를 보라카이로 정했다. 무덤덤하던 마음은 필요한 물품을 하나둘 준비하는 동안 그곳에 대해 설렘이 일기 시작했다.

출발 며칠 전 보라카이 섬에 여행객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폐쇄 위기에 있다는 신문을 접하고 남편은 떠나길 망설였으나 나는 모처럼 계획한 이 여행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출발하기로 한 날짜에 맞춰 인천공항 미팅 장소를 찾았다. 보라카이로 출발하는 여행객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용기를 내어 탑승했다. 작은 비행기는 불안정한 기류 탓에 심하게 요동쳤고 괜한 고집을 부렸나 싶어 잠깐 후회가 되기도 했다.

필리핀에 도착했을 때는 환상적인 저녁노을이 우리를 반겼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라카이 섬을 향해 배가 출항했고 목적지에 닿자 쿵 하고 배가 멈추었다. 선원들이 로프를 던지고 사다리가 놓였다. 여행객들의 짐을 나르는 부두의 사람들은 풍부한 햇볕을 받아서일까? 구릿빛 피부에 밝은 표정은 푸른 바다처럼 싱그러워 보였다.

다음 날 도심으로 나갔다. 이곳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오토바이 택시였다. 거리를 가득 메운 택시는 천장에 비 가림만 있을 뿐 사방이 뚫렸다. 오토바이 뒤쪽이나 옆으로 쇠를 덧대어 만든 의자에 함께 여행하는 일행 아홉 명이 탑승했다. 안전거리도 없었다. 앞차가 내뿜는 매연과 사방에서 날아오는 심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다. 신호등도 없는 좁은 교차로는 오고 가는 차와 사람이 함께 통행하며 곡예를 하듯 통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질서 속에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택시들, 운전자와 통행하는 사람들의 표정만은 미소를 잃지 않고 서두름이 없었다. 도로에서는 양보가 우선이었다.

염려한 쓰레기 문제는 없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휴양지의 느긋함으로 모처럼 만에 여유로움을 갖는다. 조용히 결혼생활 40년의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남편과 나는 유년시절 엄마의 부재로 인한 그리움이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이유로 다가왔고 서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콩깍지가 씌워지기 시작하면서 그가 세상 전부가 되었다. 눈빛은 늘 그를 향해 있고 내 눈 속에 그가 담겨 있는 날이 많았다. 마음의 뿌리가 없이 부유하던 내가 비로소 남편이라는 둥지에 스며들어 처음으로 행복의 실체를 느꼈다고 할까.

 

콩깍지는 얼마 가지 않아 벗겨지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가슴에 일던 훈풍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결혼생활의 현실은 녹록치 않고 옷깃을 여며도 찬바람이 일었다. 겨울이 깊으면 봄이 가깝듯이 서로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마음의 원심력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켜켜이 쌓이는 시간과 함께 미운 정 고운 정은 하나의 정이 되어 혈관을 타고 안으로 녹아들었다. 오래 살다 보면 닮는다고 했던가. 지금은 자연스레 닮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의 눈 속에 측은지심이 얼비치고 있다.

남편은 작년부터 몸 이곳저곳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병원 신세를 여러 번 졌다. 119에 실려 새벽바람을 가르며 병원에 도착하였고 중환자실에서 여러 날 내 애간장을 태웠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몸은 깊은 상처를 입고 지금은 재생을 위해 힘겨운 싸움 중이다.

오늘도 여행지에서 새로운 하루를 맞는다. 살아가는 일 또한 이렇듯 여행의 일부분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오늘따라 더욱 소중히 다가온다. 내 하늘이고 내 땅인 그가 있어 보라카이 하늘이 이리도 고운 것을. 나는 바다를 향해 앉아 그늘 의자에서 쉬고 있는 그의 등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이곳 푸른 바다의 정기를 받아 남편의 몸과 마음도 푸른빛으로 소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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