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자 수필가

 
 

의병대장 운강선생 생가를 찾았다. 3월의 햇살 아래 나목으로 선 목 백일홍, 장독대 옆 뚜껑이 덮인 우물은 옛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우물가 옆 수령이 백 년은 넘어 보이는 낯익은 향나무를 보는 순간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이곳 우물가에서 두레박으로 매일 우물을 기르던 일이 기억 저편에서 아련히 다가온다. 우물가 옆집은 서당이었다. 서당과 우리 집 경계에 싸리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대여섯 살 무렵 서당 앞마당 꽃밭에 앉아 채송화와 눈 맞춤하며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훈장님이 가르쳐준 한문 이름을 마당에 그려보곤 했다. 시공을 넘어 함께한 이 공 간이 운강 이강년 선생의 생가였다니 선생을 만난 듯 마음이 숙연해졌다. 아담한 안채와 문간채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많은 질문을 한다.

마을 앞 둔덕산은 문경 팔경의 하나인 용추폭포를 품고 있다. 선생의 탄생 설화가 얽힌 산이다. 운강이 태어나기 며칠 전부터 둔덕산이 울기 시작하여 운강이 태어난 뒤 울음을 그쳤다 한다.

마을이 한눈에 굽어 보이는 곳에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운강선생은 구한 말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1896년 의병을 일으켰다. 군사훈련이나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무수한 외세의 침략에 오직 겨레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분기한 것이다. 목숨보다 충의를 중하게 여겼던 의병의 위대한 정신을 기념관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13년간 40회가 넘는 전투에 목숨을 내놓고 활약했다. 운강 선생은 1908년 7월 청풍 작성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그해 10월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5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선생의 애민정신은 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 옥중에서

일평생 이 목숨을 아껴본 바 없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수길 다시하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 해도 넋마저 사라지랴.

 

- 형장에서

우리나라 이천만 민족이 장차

나와 같은 죽임을 당할 것이니

이것이 제일 원통 하도다.

 

역사적 의병운동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선생이 있다. 일제의 만행에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이 의병으로 출정하자 윤희순은 의병들의 음식과 의복을 조달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안사람의 의병가’ ‘병정의 노래’등 의병가를 만들어 아이들과 부녀자들에게 부르게 했으며 나라를 구하는데 남녀 구분이 따로 있겠는가. 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를 설득했다. 선생은 아녀자의 삶 대신 붓과 총을 든 여전사로 독립운동의 길을 택했다. 직접 군사 훈련에 참여하였으며 윤희순이 중심이 되어 여성의병대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만들어 의병을 지원했다. 국권침탈 이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노학당(勞學堂)을 설립하여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시켰다.

선생들의 항일 의병 투쟁은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어 3, 1 만세운동이 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민족이란 물줄기와 같아서 바위를 만나면 갈라지고 무른 땅을 만나면 스미기도 하지만 끝내는 합쳐서 하나로 흐른다.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후손들을 위해 소중한 목숨도 아낌없이 내어준 선열들의 피와 땀 애민정신의 울림이 크다. 100주년을 맞이한 3,1절의 함성과 노래가 뜨겁게 가슴을 파고들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3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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