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전 청주고교장,칼럼니스트

 
 

(3) 청주고 시절(1979-1983)

79년 청주고로 전출되었다. 3월 초 김○○학생이 결석을 하여 가정 방문을 하니 사람을 기피하고 학교 가기를 싫어하고 하루에 가족과도 한 두 마디 대화가 고작이었다. 그 후 며칠간 내덕동에서 수곡동 학생 집을 거쳐 반 강제로 택시로 학생과 출근을 하며 우유도 사 먹이며 손도 잡고 대화를 기도해도 말이 없다.

청소시간 등 시간 나는 대로 대화를 했더니 “대학을 어떻게 가겠느냐”는 말이 전부였다. 속이 터지고 힘들었지만 12월 하순 제자들이 보낸 수십 통의 글과 연하장 속에서 김○○의 연하장을 발견했을 때는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과 교직에 보람을 느꼈다.

79년 초 김○○의 글을 받았다. 충주에서(충주중) 가르친 제자로 몇 차례 고비를 넘기고 무던히 담임 속을 썩이고 겨우 졸업한 학생이었다. 대한 통운 조수로 있고 전과자가 된 동기생 이야기와 지금 새벽 4시인데 운전면허 시험 준비를 하다 선생님 생각이 나서 글을 쓴다는 내용이며 선생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장래 문제를 상의했으면 좋겠다는 글이었다.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몇 차례 답장을 쓰며 격려했다.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다.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만 전해 준다면 학원 강사나 다름없다고 본다.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방황하기 쉬운 청소년기에 대화를 통해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가슴 벅찬 문제들을 풀어주며 적성과 능력에 맞는 진로 결정을 도와주며 확고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처벌만 한다면 교육이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79년 이웃 반 학생인 김○○군이 면담을 요청해 왔다. 시골에서 청고에 입학해 고향과 가정에서 큰 기대를 걸고 있는데 성적이 자꾸 떨어져서 정신적 고민이 크다고 했다. 당시는 상담실이 없어서 본관 옥상에서 면담을 하고 자주 대화를 가졌다. 지금은 열심히 대학에 진학 학업에 정진하고 있다.

80년 담임 반(2-3)에는 시내 학생회장 3명을 포함해서 1학년 때 학급 간부 경력의 학생이 4명이나 되고 문제성 있는 학생이 6명이나 되었다. 우수한 학생이 많으면 때로는 배타적이고 협동과 인화가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다. 4명을 실장, 부실장과 총무를 2명으로 늘려 임명하여 4명이 분업 체제 아래 협력해서 학급을 운영하였더니 화합 속에 운영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정초에는 함께 들 와서 세배를 하고 대학 생활과 장래 문제를 상담하곤 한다. 80년 여름 이웃반 이○○가 면담을 요청해 왔다. “몸이 아파서 죽고 싶은 심정”이란다. 중학교 3학년 때 79일이나 결석을 하면서도 청주고에 입학했던 투병담을 들려주며 시간 있을 때마다 대화를 나누었다. 그 후 운동장에서 밝은 표정으로 뛰노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흐뭇했다.

반공 시사를 맡아 반공 의식과 국가관 확립에 주력했고 학생들의 바른 몸가짐과 예절, 언행이 일치하도록 지도하는 데 힘썼다. 내가 수업에 들어가면 학생들은 단정한 자세로 수업에 임한다. 태도가 바르지 못한 학생이 있을 때는 “가정교육이 잘못 되고 부형님이 교양 부족인가 보다”라고 농담조로 말한 덕이라고 할까? 언제 어디서나 인사 않는 학생과 교통 규칙을 위반한 학생은 반드시 지적해서 인사하는 습성을 기르고 질서의 생활화에 주력했더니 큰 성과를 보았다.

81년에는 본교가 문교부 지정 정화시범 연구학교로 윤리부에 소속되어 정직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길러 분수를 지키고 본분을 다하는 민주 시민의 자질향상을 위하여 건전한 독서생활과 학급마다 비치된 “생활본”을 활용해 질서의 생활화(교통, 교내, 행동질서)와 기본생활습관 형성 지도에 노력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자아를 실현하고 교양을 넓혀 인격을 도야, 진로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선후배간에 대화를 통해 꿈과 용기를 심어주고자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선배님들을 모시는 “청고인의 광장”을 마련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우수한 개인보다는 전체 속에서 조화와 협동할 수 있는 자질을 배양하는데 힘썼다. 81년에는 담임반(1-6) 학생들이 합심하여 춘계 교내 체육대회에서 응원 및 입장상을 받고 82년에는 담임반(2-10)이 성적도 1위였고 정화 시범 모범 학급으로 학교장 표창을 받고 83년에는 담임반(3-6)이 1학기 말 성적 1위를 기록했으며 청주시장으로부터 “도덕 선진 시민증”을 받았지만 내 생활을 돌아볼 때 부끄럽기 짝이 없다.

청소년기에는 과도기로 혼자서 소화할 수 없는 벅찬 일들이 쌓여있다. 주위에는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 누구도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다행히 금년에는 상담실이 마련되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정직해라,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것을 강조했다. 잘못된 일도 정직하게 털어놓으면 때로는 용서를 해주었다. 점차 이성문제 등 자신의 문제를 터놓고 대화를 나누고 해결하려는 학생이 늘어갔다. 이성교제, 흡연, 음주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그렇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생활지도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도 문제 해결에 접근할 없다.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고 치료가 이루어져야 한다.

82년 담임반(2-10:모범반) 학생들을 수차례 걸쳐 학생 전원을 면담했다. 잘한 일을 찾아 칭찬해 주고 성적이 향상되면 격려해 주었다. 어느 날 교감 선생님의 부름을 받았다. 어느 학부형이 전화로 말하기를 아들이 집에 오더니 “담임이 자기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면서 기뻐하여 가정 학습 태도에 변화가 와서 고맙다고 전해 달라는 내용이다. 언젠가 “너는 씨(종자)가 그러냐”는 선생의 말을 들었던 국민 학생이 후일 일본의 희대의 연쇄 살인범이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며 교사의 한 마디가 큰 영향을 줌을 실감했다.

 

3. 교직 생활의 보람

바쁜 일과 속에서나 한해를 정리하는 세모에 수십 통의 연하장 속에서 그렇게 속을 썩이던, 방황하던, 역경 속에서 노력하던 제자들의 연하장과 글을 받거나 대견스런 그들의 모습을 대할 땐 그래도 많은 방황 끝에 마지막 택한 교직은 현명한 판단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특히 초임교인 가금중학교 제자인 백○○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 고교 진학을 포기한 상태에서 글을 주고 받고 만나기 10여 년, 그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해서 여공 생활 2년 후 지각생이 되어 충주여고에 입학, 늦게나마 청주교대를 거쳐 경기도 내 ○○초등학교에서 2세 교육에 헌신하고 있다.

요사이도 재학생, 졸업생들에게 오는 글이나 문의전호, 면담 요청 등은 그래도 격무 속에서도 하루의 보람을 찾게 하고 대견스런 그들의 모습을 대할 때는 보람을 느끼는 행복한 순간들이다. 제자들의 글 속에는 “학급 생활 목표”를 잊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적어준 좌우명을 명심해서 성실히 생활한다는, 때로는 학창 시절 선생님의 그 말씀을 명심해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 교사의 일거수 일투족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되고 사표가 되어야 하는가를 새삼 느꼈다. 그러기에 참된 교육자의 길은 어려운 길이요,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4. 교육에 대한 나의 소신

나는 평생을 통해 그들과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고 충고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일생에 걸친 스승이 되고 싶다. 교육은 뜨거운 마음과 마음이 와 닿지 않고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믿는다. 73년 어느 초등학교에 들렀을 때 “선생은 반장만 사랑 한다”는 화장실의 낙서를 발견했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편애가 아닐지라도 학생들이 편애로 느낄 수 있는 언행은 삼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본다. 결코 교육은 전시 효과적이어서는 안 되고 실적위주여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부단히 대화를 통해서 이해하고 생활 습관을 바로잡아 줄 때 그들은 언행이 일치하는 정직하고 창의성 있는 민주 시민의 자질을 갖춘 내일의 주인공이 되고 질서 잇는 명랑한 사회가 건설될 것이다.

지난 나의 교직 생활을 되돌아보면 부끄럽기만 하다.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으니 말이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망설임(74년도 중앙정보부시행 수사관시험 합격해 전진하려다 포기)에 갈피를 잡지 못한 나였지만 교직이 갖는 기쁨을 조금은 알 듯 하며 열과 성을 다해 후진 양성에 최선을 다 할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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