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준 식 전 음성교육지원청 행정과장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5년이나 되었다. 65세의 이른 나이에 무엇이 그리 바빠서 일찍 가셨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동네에서는 무서운 분으로 통했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보시면 바로 지적을 하고 혼을 내셨다. 그래도 나한테 만큼은 말은 하지 않으셔도 다정한 하셨고 혹시 잘못이 있어도 믿어 주시곤 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때에는 원서를 내고 시험이나 한번 보겠다는 나를 말없이 오셔서 점심을 사주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항상 어렵고 두려운 존재였다. 요즘 우리아들은 아빠에게 주로 반말을 한다. 나는 속으로 “배울 만큼 배운 놈이 말하는 본대는!” 하지만 그래야만 친근감을 느끼고 좋다고 한다. 그렇다고 속에 있는 말을 다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아들하고 거리감이 없어서 좋다.

흔히 부자관계는 서먹하고 불편할 때다 많다. 아들을 통제의 대상이나 도전하는 존재로 보는 경향도 있는가 하면, 속으로는 사랑하고 아끼지만 무관심한 척, 무정한 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중책에 대한 무거움으로 자녀와 소통이 부족하고 많이 소원하게 된다. 학문적으로는 이성관계가 아닌 동성관계로 서로 대척하는 관계라고도 한다. 반면에 모자관계는 어머니는 사랑과 헌신으로 자식을 대하여 가깝고 친밀한 관계라고 한다. 어머니의 헌신은 일방적이고 운명적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어릴 때는 순종적이고 통제에 잘 따르지만 커가면서 점차로 통제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아버지의 통제가 심하면 심할수록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부자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의 존재를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분열이 생긴다. 아들의 잘못된 점을 찾아서 밝히고 지적하면서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고자 한다. 아들은 부모의 지적이 부당하다고 느끼고 통제를 벗어날 근거를 찾게 되고,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관계로 돌아설 수도 있다.

어려운 시절 우리네 아버지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를 교육하는 중책을 혼자서 해 내면서 어깨가 늘 무거웠다. 아침 일찍부터 출근하여 일하고 늦게 끝나는 시간이면 술 한 잔 걸치고 자녀들 자는 모습만 보고 또 출근했다. 어쩌다 휴일에 같이하는 시간이면 할 말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방에 들어가 쉬곤 했다. 자연 자녀들과의 대화는 거의 없었고 소통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애교가 있는 딸은 관심을 받기도 하지만, 늘 소원한 관계인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말을 붙이기 겁을 내게 되고 아버지와 같이 있는 공간이 불편하게 마련이었다. 부자간에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남만도 못한 사이가 되고 만다.

요즘의 시대는 자녀도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시대이고 부모는 훌륭한 조력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시대로 급변하고 있다. 자녀의 독립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아들의 진로를 결정해주고 집안의 대를 잇게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설령 서운함과 노여움이 있다고 해도 인내를 가지고 또 지혜롭게 속으로 삭이며, 훈육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대화의 기회를 애써 만들어야 하고 사회에 적응을 지원하여 훌륭한 독립자로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아들과 딸을 대등하게 대하는 태도도 견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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