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돌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두루뭉술한 삼각형이다. 등은 소나무 껍질을 닮았고, 바닥은 평평하다. 머리 부분은 뭉툭하니 들려있어 마치 하늘을 보는 듯하다. 언뜻 보면 두 눈도 있는 듯도 하고 코와 입까지도 다 새겨져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꼬리 부분도 뾰족하니 튀어 나와 있어 동물의 형상이라 해도 믿고도 남는다.

친구와 지난 해 여름, 태안의 바다로 여행을 간적이 있다. 우리가 머문 곳은 ‘곰섬’ 주변에 있던 펜션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숙소를 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마음이 동하여 무작정 떠난 여행이니 누구에게도 원망을 할 일도 못 되었다. 그렇게 빈 펜션을 찾아다니다 든 곳이 곰섬이었다. 바다를 보려면 10분정도를 걸어가야 하고, 값도 주말이라 그런지 비싼 편이었다. 날도 어둑어둑하니 더 이상 찾아다녀 봐도 별 곳 없다 싶어 우리는 그곳을 숙소로 정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친구가 준비해 온 와인 한 병을 비우고 맥주 몇 캔을 마시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일 년에 두 세 번 밖에 만나지 못하니 쟁여놓은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다음날 아침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바닷가로 향했다. 우리는 그 바닷가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곳에는 바다 쪽으로 몸을 길게 내밀고 있던 돌섬도 보였다. 바닥에는 유난히 예쁜 돌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의 돌을 찾기 시작했다. 친구는 동글동글하게 생긴 작은 공깃돌 다섯 개를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울퉁불퉁하고 거무죽죽한 돌을 찾아냈다. 어쩌면 돌 하나에도 그리도 자신들을 닮아 있을까. 친구의 손 안에 있는 돌들은 누군가와 부딪히기를 싫어하고 배려심이 많으며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는 친구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반면 내가 주운 돌은 한손으로 들기에는 묵직하고 못생긴 돌이었다. 남들과 똑 같음을 거부하는 나는 중간이 없고, 맺고 끝맺음이 확실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한 성격 탓일까. 주운 돌을 보면 하나같이 모난 돌이 대부분이었다. 내 손안에 있던 돌을 가만히 보니 마치 저 앞 돌섬의 형상과 사뭇 비슷해 보였다.

그렇게 우리 집으로 온 그 돌은 발코니 난간위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햇볕이 좋은 날에는 이불 빨래가 날아가지 않도록 누름돌이 되어 주며, 코로나 19로 꼼짝을 못했던 올 여름에는 그 돌은 어느새 섬이 되어 그 바닷가로 나를 데려다 놓곤 했다. 어디 그뿐인가. 울퉁불퉁한 그 생김새는 길냥이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드는 든든한 부빔돌이 되어주기도 한다.

며칠 전 하얀 눈이 발코니위에 소복히 쌓인 날에도 그 돌은 홀로 까맣게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었다. 예쁘면 관상용 돌이 되어 집 안 장식장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눈, 비를 맞고 서있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로서 남는 일일 테니 말이다.

누군가에게 꿈을 꾸게 하고, 누군가의 다정하고 든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곰섬을 닮은 그 돌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랬으면 좋겠다. 거창하지도, 빛나지도 않는, 게다가 모난데도 많은 내 삶들이 누군가의 가슴에서 따듯한 온기가 되고, 추억이 되고, 용기가 될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는 또 그 바닷가 어디쯤에 있을 모난 돌 하나를 찾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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