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옛일을 기억하는 건 즐거운 일일수도 있으나 때론 슬픈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오래된 친구와 나누는 이야기에는 언제나 즐거웠던 순간에 대한 추억들 뿐 이다. 분명 그 시절은 헐벗고 부족함이 비일비재 했음에도 말이다.

사람이 사는 날이 많으면 그에 맞게 친구도 많아야 하고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의 수가 쌓여 가야 한다. 그런데 사람의 관계는 이상하게도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친구도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정인의 수도 가난해 지는 건 왜일까.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의 지인들도 사정은 비슷해 보이니 살아 낸 횟수와 인적 재산의 크기는 비례하지 않는 듯하다. 변명이라면 구차할지 모르나 나의 경우는 살갑지 못한 내 성격 탓 일거라고 보아도 무방할 터이다.

가끔 잊을만하면 연락이 오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 역시 오랜 세월을 연락도 없이 지내다 몇 년 전 먼저 연락을 해 와 이어지게 되었다. 그 친구와는 그야말로 죽마고우이다. 그 친구의 집과 우리 집은 아주 가깝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그리 멀지도 않았다. 밭을 가운데 두고 대문을 마주보고 있는 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동네 친구들 중에는 제일 잘 어울렸다. 어제도 그 친구는 우리의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펼쳐 놓았다.

여름밤이면 우리는 동네 가운데를 흐르던 넓지 않은 개울의 상류에서 목욕을 하곤 했었다. 읍내의 목욕탕이 여름철에는 문을 열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어쩌면 그것도 또래 여자 아이들의 놀이였지 싶다. 개울에서 목욕을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개울 바로 옆에는 용배네 할아버지의 수박밭과 참외 밭이 있었다. 깜깜한 밤, 덩굴을 헤집고 몰래 따 온 수박은 한 번에 성공할 리 만무했다. 밤이니 쪼개 보아도 잘 익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덜 익어 비릿했던 그 수박 맛을 지금도 나는 잊히지 않는다. 지금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남의 밭에서 수박서리를 하는 꿈은 꾸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네 것, 내 것보다는 우리 것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때였다. 다음날 아침이면 개울에는 덜 익은 수박의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어도 범인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굳이 잡으려 하지 않아도 누가 그랬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사람의 세월은 기억을 잊어가는 시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기억의 저 먼 밑바닥을 훑어보면 잡을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설령 먼 기억들이 생각난다 해도 어쩌면 즐거웠던 일보다는 아프고 힘들었던 일들이 더 새록새록 떠오를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순간들도 세월이라는 특효약으로 인해 연해지고 무뎌져 다시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 된다. 반대로 그때 그렇게 즐거웠을까 할 정도의 소소한 행복들은 거대한 풍선처럼 커져 가슴을 따듯하게 데워주는 난로가 되어 주곤 한다.

우리 집에서 무엇을 그리 맛있게 먹었던 것일까. 나는 생각나지도 않는 일인데도 친구는 정말 맛있고 좋았다고 목청을 돋우고 있다. 우리의 먼 기억은 추억을 담은 우물일까. 퍼내면 또 생기고, 솟아오르니 말이다. 추억의 우물에서 길어 오른 이야기들이 참 맑기도 하고 달기도 하다. 수박이 익으면 이웃들과 나누어 먹고, 떡이라도 하는 날이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나누어 주느라 신나게 발품을 팔곤 했던 그때가 그립기만하다. 그것은 아마도 마르지 않는 기억의 우물을 간직한 오래된 친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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