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전 청주고교장, 칼럼니스트스트

 
 

대학시절에 동기생들은 학훈단 소위로 입영하여 소위로 임관하고 일반인들은 30개월을 근무할 때, 나는 김신조일당의 남파로 36개월을 근무하게 되고 4학년 때 신체검사를 받는데 병과가 050이라고 해서 들어보니 헌병이라고 해서 남들은 부관학교도 가는데 왜 나는 헌병학교를 가도록 하느냐 하자, 대학 전공이 법학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충주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수업을 마치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멍하니 서 잇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아버지께서는 팔남매의 둘째이셨으니 우리는 따로 살았지만 나는 할머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어린시절을 보냈다.

청주고 재학시절, 어쩌다 집에 가면 할머님께서는 뜸부기를 고아 놓으시고 저를 불러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셨고, 군에 입대(入隊)하는 손자에게 비자금(秘資金)으로 갖고 계시던 용돈을 쥐어 주시며 이제 네가 제대하는 것을 못 보겠구나 하시며 눈물로 전송하시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할머님께서는 젊으셨을 때는 11대 종가(宗家)의 맏며느리로 가정의 대소사를 맡으셔야 했고, 떠도는 사람들에게 숙식(宿食)을 제공하시던 조부님의 뜻에 따라 영일(寧日)이 없으셨다.

할아버지께서 해방 전 돌아가신 후에는 팔남매를 혼자 키우시며 집안의 어른으로, 마을의 어른으로 큰 자리를 지켜오셨고, 근엄 하시면서도 정(情)이 많으셨다. 백부님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시어 매년 할머님 생신은 집안의 잔치요, 동네  잔치 날이 되었다.

정부인(貞夫人)이셨던 시할머니와 숙부인(淑夫人)이셨던 시어머님, 구한말에 예조참판을 지내신 시조부님(陰城郡誌 名官篇)과 시아버지께서는 사천현감을 지내시고 합일합방후 “십일불식(十日不食)하시어 자절(自絶)” (陰城郡誌 節義篇)한 가문을 지켜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초시(初試)에 급제(及第)하신 후 음성군원남면보천리시장(보천역 기차길 옆) 동산에 난정(蘭亭)을 세우시고 팔도유행들과 춘추로 시작(試作)을 하시며 청빈하게 살아 오셨으니 팔남매의 둘째인 아버지께서는 물려받은 재산 없이 지주(地主)의 맏딸인(대소면수태리)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사천현감을 지내신 시아버지께선 청빈하신 생활로 물려받은 재산 없이 종가(宗家)를 지키시며 팔남매를 키우셨으니 어렵고 힘든 세월이셨지만 백부님께서는 50년대의 가난한 시절에도 엽총을 소지하시고 사냥을 하시어 할머님을 극진히 모셨다.

일제(日帝)의 강점기에 아들을 강제징병으로 사지(死地)로 보내시고, 6.25전쟁을 겪으시며 한시도 걱정이 그칠 날이 없으셨던 할머님. 모든 시름 잊으시고 어떻게 저희들 곁을 떠나셨는지? 할머님께서는 내가 교직에 들어와 충주에서 부부교사로 근무했던 아내와 신접살림을 할 때 손자가 어린증손녀를 데리고 사는 모습을 보시고 대견스러워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47년 전에 할머님 모신 상여가 떠나던 날 그렇게 목 노아 울었는데 할머님 생각이 잔잔한 마음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으니 내가 불효(不孝)인가 보다.

얼마 전 귀향길에 백부님 댁에 들렸더니 정적이 감돌며 무성하던 대추나무는 자취를 감추고 그루터기만 남고 어린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마을에는 여기저기 빈집이 버려진 채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덧없는 인생임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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