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지금은 짜장면이 귀하지도 않은 음식이지만 자주는 먹지 않게 된다. 기름지기도 하거니와 너무 자주 먹게 되면 질리는 음식이다. 그런데 어젯밤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짜장면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는 먹고 싶다고 했더니 오늘 점심에 남편이 사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맛났다. 배가 부르다면서 면 한 가닥도 남기지도 않고 먹는 내 모습을 남편은 흐뭇하게 바라본다.

예전에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짜장면이었다. 남편은 내가 살던 곳보다 더 시골이니 더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읍내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 짜장면은 쉽게 먹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성년이 되기 전에 짜장면을 먹었던 날은 내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을 했을 때 뿐 이었다.

1980년대 시골 읍내의 중국집들은 학교 졸업식이 있는 날이면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대박이 나는 날이었다. 내가 사는 이곳은 그때 읍내에 초등학교 세 군데와 남중 두 군데, 여중 한 군데, 여고와 남고가 각각 한 군데나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각 가정마다 아이들이 많은 시대이다 보니 작은 읍내인데도 제법 학교가 많았다. 지금은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 된 지 오래고, 중학교들도 학생 수가 적어서인지 남녀공학을 했으면 하는 학부모들이 많다. 그렇다 보니 학생들의 졸업식이 있는 날인데도 그리 북적이지 않는다. 더구나 졸업식 날 짜장면을 먹는 가족은 흔하지 않다.

지금도 따뜻함으로 가슴 뭉클했던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을 했던 1980년도 우리 학교는 뒤편의 목조 건물 강당에서 졸업식 행사를 했다. 난방시설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강당을 가득 메운 졸업생과 가족들의 온기는 졸업식장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정들었던 선생님들과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울지 않는 학생들은 없었다. 그렇게 한바탕 눈물로 이별의 졸업식을 마치고 읍내에는 자랑스러운 졸업장과 꽃다발을 손에 들거나 목에 건 학생들의 모습으로 거리가 환했다. 졸업생들과 함께 걷는 가족들의 모습에서도 뿌듯함과 대견함으로 작은 읍내를 들뜨게 했다. 그렇게 가족 단위로 삼삼오오 찾아가는 곳은 대부분 중국집이었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제외한 어머니와 언니, 오빠가 모두 함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빠들은 아마도 짜장면 때문에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때 짜장면값은 300원 정도였다. 지금 읍내 짜장면값이 보통 6, 7천원인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도 그 중국집은 영업 중이다. 하지만 그때보다 규모가 훨씬 축소되었다. 그때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홀이 나왔다. 홀에도 탁자가 많았지만, 홀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원이 나오고, 그 정원을 중심으로 빙 둘러가며 방이 꽤 많았다. 우리 가족은 그 정원이 보이는 방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따끈따끈한 온돌방은 졸업식 내내 떨었던 온몸을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짜장면은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이었다. 가끔 그 중국집을 가게 되면 나도 모르게 안채를 힐끔거리게 된다. 지금은 안채로 들어가는 문도 없어져 버리고 홀 안도 탁자가 많지는 않다. 거의 배달을 시켜서 먹는 추세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전 문전성시를 이루던 영화는 없는 듯하다. 아무래도 음식의 다양화가 이곳 읍내에도 불어 왔으니 중국 음식을 선택하는 사람의 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입는 것도 먹는 것도 넉넉하지 않던 그 시절, 짜장면은 분명 우리를 행복하게도 설레게도 해 주던 음식이었다. 지금은 비만을 부르는 음식이라 하여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에게는 그리움을 불러오는 음식 중 하나다. 그것은 짜장면으로 인해 어린 자식들이 부자가 된 듯 행복해하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엄마를 소환해 주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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