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버스 터미널은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붐볐다. 일 년이면 몇 번밖에 이용하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밖이 훤히 보이는 창 쪽에서 서성였다. 물론 여고 시절 때는 첫차를 타거나, 막차로 돌아올 때도 이곳은 나의 하루가 시작되는 출발지였고 종착지였다. 어디 그뿐인가. 서울로 직장을 구하러 갈 때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이 터미널은 나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먼 길을 돌아 고단한 몸으로 이 작은 터미널에 내리면 언제나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내 차가 생기자 버스를 타는 일이 번거롭다는 생각에 터미널을 찾는 일은 드물었다.

터미널 밖은 눈길로 사람도 차도 느리터분했다. 그때 터미널과 마주한 곳에 ‘서울다방’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2층에 자리한 ‘서울다방’은 30년은 족히 넘고도 남는다. 나의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다방’은 30년 전만해도 이곳 읍내에서는 만남의 장소였다. 내 친구도 그곳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았다. 지금의 다방은 나이 지긋한 분들의 전용공간이 되었지만, 그 시절 다방은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친숙한 공간이었다. 내가 처음 커피를 맛보았던 곳도 다방이었고, 젊은 시절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던 곳도 다방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문인협회 활동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20년 전쯤 총무라는 직책을 맡았던 때가 있었다. 지부장님은 나이가 지긋한 분이셨는데 할 이야기가 있다며 서울다방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물론 그때는 많지는 않지만, 카페가 드문드문 들어서던 때라 작은 이곳 읍내에도 젊은이들은 다방보다는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이용했다. 나도 결혼을 한 후로는 다방을 찾지 않았다. 친구들도 다방보다는 레스토랑에서 만나곤 했으니 낯설 수밖에 없었다. 서울다방에서 지부장님은 계란 노른자를 동동 띄운 쌍화차를 사 주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방에서 맛본 쌍화차는 보기와는 다르게 고소했다. 그날 지부장님과 많은 일을 상의 한 것 같은데 생각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날의 쌍화차는 내 삶에서 잊히지 않는 맛으로 기억되는 것은 푸근했던 다방이 한몫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서울다방은 읍내 사람뿐이 아닌 외지 사람들에게도 호감의 장소인 듯도 하다. 한 번은 내가 등단하고 들어간 전국 모임 문학회 회장님이 이곳 음성을 내려오신 때가 있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을 빨리 도착한 그분은 나에게 도착했다 연락도 하지 않으시고 ‘서울다방’으로 올라가신 모양이었다. 내가 약속 시간에 맞춰 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회장님은 계시지 않으셨다. 그때 맞은편 2층에 있는 서울다방 유리창으로 고요히 생각에 잠긴 사람이 보였다. 차림도 모습도 누가 봐도 음성과는 이질적이었다. 그분은 왠지 그곳에 들어가 보고 싶으셨다고 했다. 아마도 회장님은 그날 그곳에서 글 한 편은 쓰고 나오셨지 싶다.

이상하게도 ‘서울다방’은 전국의 작은 읍내 어디를 가나 만날 수 있다. 그만큼 서울이라는 곳은 시골 사람들에게는 가고는 싶지만, 쉬이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서울다방’을 찾는 것은 아닐까. 서울은 시골 사람들에게는 성공을 증명하는 곳이며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이상향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우리 동네에서는 언니나 오빠가 서울에 있는 대학, 또는 직장을 다닌다고 하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자식이 서울이라는 대처에서 산다는 것만으로도 그 집 부모는 어깨가 올라가곤 했다. 서울은 그만큼 이 작은 읍내에서는 언제나 선망의 도시니 여태껏 저리도 당당히 걸려있는 것은 아닐까.

버스는 어느새 음성의 마지막 마을을 지나가고 있다. 며칠째 내린 눈은 작은 도시를 온통 설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저만치 보이는 산속의 소나무들이 하얀 눈을 듬뿍 이었다. 무거운 어깨는 축 늘어졌다. 문득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그렇게 설국의 문장과 소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버스는 어느새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꿈을 꾼 듯 눈은 온데간데없고 빈 나무들만이 버스 뒤편으로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마치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세상일이니 잡으려 하지 말라는 경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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