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중학생이었던 그때 학교 가는 길은 그리 수나롭지가 않았다. 1980년대 초, 지금처럼 길도 시원하게 뚫리지도 않아서 학교를 가려면 논과 내를 건너야 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은 질척질척한 흙길에 신발이나 옷이 엉망이 되기 일쑤다. 그러니 비가 오는 날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오성동은 음성여중을 가는 길목에 있던 동네였다. 그 동네는 우리 마을 학생뿐 아니라 산 너머의 동음리와 초천리에서 오는 학생들도 꼭 지나야 했다. 우리 집은 읍내에서 조금 벗어난 신천리 중리였다. 우리 집에서 음성여중까지는 약 30분에서 40분을 걸어야 했으니 산 너머 동음리나 초천리에서 오는 학생들은 적어도 두 시간은 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먼 거리를 친구들은 지각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는 오성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모습 때문이다. 동네 입구에는 큰 다리가 있었는데 아침이면 까맣게 그을린 개의 사체가 다리 난간에 몇 마리씩 매달려 있는 때가 많았다. 다리 바로 옆에 개고기를 파는 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하던지 우리는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그곳을 지나치곤 했다. 그렇게 다리를 지나오면 고개 마루인 마을길 중간쯤 옹기 가마터를 지나가게 된다. 옹기 가마터 때문인지 몰라도 마을길은 언제나 까맣고 지저분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은 길이 온통 지렁이로 가득했다. 어디서 그리도 많은 지렁이들이 기어 나왔는지 지렁이를 피해 소리를 지르며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옮기곤 했다. 지금은 연립과 상가, 교회가 들어서 번듯한 동네가 되었지만 그 시절 그곳은 빈민촌에 가까웠다. 나와 꽤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옹기 가마터 근처에 살았다. 어느 날 그 친구 집에 가게 되었는데 옹색한 살림살이가 어린 내 눈에도 보였다. 주변의 집들도 친구의 집과 별반 다르지 않게 비금비금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네 가족은 천주교 신자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사실 오성동에는 천주교 성당이 있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학교가 파하고 나면 곧잘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 성모 마리아 동산에서 놀다 오곤 했다. 오성동은 당시에는 점말이라고도 불렸는데 유독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고 한다. 1940년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점말에서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가마터에서 옹기를 구어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옹기를 꺼내는 날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렸는지 마치 장이 서는 것 같았다고 한다. 까만 항아리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줄지어 서 있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은 옹기를 굽던 가마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고개도 평지가 된지 오래다. 그리도 넓던 다리도 없어져 버렸다. 다시는 돌아가지도, 볼 수도 없다는 이유 때문일까. 친구들과 오르내리던 오성동 그 길이 그립기만하다. 아침이면 넘어지지 않으려 아슬아슬 걸었던 논길, 지렁이가 꿈틀대던 비오는 날의 고갯길, 배부른 까만 항아리들이 반짝이며 모여 있던 가마터의 모습,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어제처럼 또렷하게 지나간다.

로마의 시인 마르티얼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라고 했다. 돌아 갈 수는 없지만, 이렇게 먼 과거를 소환하고 보니 잠깐이었지만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때는 힘들고, 어렵고, 허기진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내 삶이 빛나는 것은 그동안의 모든 순간, 하루들이 모여, 이렇게 소중한 결실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마치 또 다른 인생을 만나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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