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희 수필가

언제부터 기분상해죄는 일상이 되었다. 주문한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별점으로 응징하고 자신의 아이 기분을 나쁘게 했다는 이유로 아동학대로 신고하고 친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민원을 넣는다. 법보다 기분이 먼저다. 내 기분을 위해 법을 어기고 내 기분을 위해 가짜 뉴스를 만든다. 그래서 누군가 바른말을 하면 내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까 상대에게 모욕감을 준다. 문제는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 여긴다. 그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 되잖아.

나 역시 그런 사람들의 부류였다. 약간의 과대망상도 있어 무슨 문제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미리 짐작하여 상상만으로 상처받았다. 나는 그 상처를 오래 생각했고 미워했고 복수를 꿈꿨다. 권선징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선()이었다. 그것은 올바른 거라 생각했고 세계를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기분처럼 불확실한 것이 또 있을까. 기분은 시시각각 변한다. 귀여운 것을 보면 기분이 좋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기분이 좋다. 슬픈 것을 보면 한없이 슬퍼지고 날이 습해지면 짜증부터 난다. 처음부터 박힌 감정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 의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 기분이다. 그런 기분이 세상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데 대부분 이유가 가해자들의 기분 때문이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법으로 피해자를 괴롭히고 돈이 없으면 힘으로 죽인다.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나의 기분이 세상의 기준이었을 때 나는 고립을 택했다. 기분은 불안정한 것이었으므로 세상 모든 것이 불안정해 보였다. 아무도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지만 늘 죄인 같았다. 세상을 편리하게 살고 싶었던 선택은 자진해서 감옥으로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감정도 고립되었다. 고립된 감정은 어디에도 흐르지 못하고 썩고 썩어서 내 마음을 오염시켰다. 그것이 열등감인지 몰랐다.

중심이 없는 열등감은 기분이 기준이 된다. 기분대로 말한다. 쉽게 욕하고 쉽게 판단한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조금만 실수해도 참지 못한다. 어떻게든 나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마음이 썩어 작은 상처에도 남들보다 백만 배 아프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다.

한때 부모들 사이에서 마음 읽기가 중요한 교육으로 통했었다. 아이 마음을 읽고 아이를 이해하는 교육이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아이를 이해하는 과정일까. 어쩌면 아이를 통해서 자신을 보았던 게 아니었을까. 마음을 읽는 것은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 마음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해는 이해일뿐, 기준이 아니다.부모는 아이에게는 바른 기준을 심어줘야 한다. 그것이 지금 아이를 힘들게 해도 어쩔 수 없다. 기준이 없는 아이는 기분만 남는다.

그것을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나는 세상을 조금 둥글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의 기준은 단단하지 못하다. 어린아이처럼 기분에 따라 많이 흔들린다. 하지만 기분에 상처받고 싶지 않다. 기분이 내 전부가 되고 싶지 않다. 기분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기준들을 떠올리며 나를 토닥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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