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희 수필가

귀여운 그림을 작은 가위로 오린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칼 선 없는 스티커라 일일이 잘라줘야 한다. 몇 년 전부터 일기를 쓸 때 스티커를 붙인다. 처음 전단지를 오려 붙였다. 족발을 먹어서 족발 사진을 붙인 거 같은데 그 이후 스티커나 잡지 사진을 오려 일기에 붙였다. 그것을 다꾸라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일기를 쓸 때면 일기의 내용보다 어떤 스티커나 사진을 오려 붙일지 고민한다. 그날 일상과 상관없을 때도 있다. 손이 가는 대로 할 때가 더 많다. 오히려 그날의 일상에 맞추어 사진이나 스티커를 찾게 되면 다꾸 시간은 더 오래 걸린다. 한번은 피자를 먹은 날, 피자 사진과 스티커를 찾기 위해 2시간이 걸린 적이 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순간 회의가 들었지만 그래도 다꾸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하루 중 유일한 힐링 시간이다. 온전한 나의 시간이자 창작의 시간이다.

다꾸를 하다 보니 스티커를 많이 사게 되고 많이 사도 결국 만족할 수 없어 수제 스티커까지 손을 뻗었다. 수제 스티커는 내가 직접 만든 스티커로 요즘은 인터넷으로 직접 스티커를 제작할 수 있다. 얼마를 추가하면 칼선도 만들어 쉽게 스티커를 뗄 수 있지만 추가 요금이면 스티커 한 장을 더 만들 수 있어 칼 선 없는 스티커로 제작한다. 사실 돈도 돈이지만 나는 가위로 오리는 것을 좋아한다. 약간은 흰 선 테두리가 보이도록 자르는 것이 나는 이유 없이 좋다. 한참 가위질을 하다 보면 손과 손목이 아플 때도 있다. 정신없이 하다 보면 몇 시간 훌쩍이다.

큰 당숙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가 할머니 댁에 무엇을 갖다 드리며 밤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아니면 할머니가 불러서 간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는 씀바귀를 다듬고 있었다 실가닥처럼 가는 씀바귀를 다듬고 계셨는데 며칠 동안 밤새 다듬는 중인데 아직도 다듬을 것이 많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다듬은 씀바귀를 한 바가지를 주셨다. 사실 반갑지 않은 선물이다. 우리 집은 씀바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주신 것이라 반갑게 받는 척했다. 할머니는 가져갈 자식들이 많아서 씀바귀를 많이 다듬어야 한다며 계속 손을 쉬지 않았다.

할머니뿐만 아니다. 다른 동네 할머니들도 이런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는 사다 먹는 것이 더 싸고 더 편해 보이는데 아픈 몸을 이끌고 자기 몸도 주체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 그 수고스러움이 이해되지 않았다. 일은 일대로 하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 수고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좋아하는 스티커를 일기장에 붙이면 기분이 좋다. 특히 일상과 맞닿아 있는 스티커를 붙이면 어쩐지 오늘 하루를 충실히 보낸 것 같고 네잎 클로버 스티커를 가득 붙이면 부정했던 오늘 하루가 깔끔히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일기의 내용도 달라진다. 악을 쓰듯 괴로움을 토해내던 지난날도 어느새 일기장에 붙인 스티커처럼 순해진다. 날것의 감정들이 오리고 붙이는 사이 정리되었다.

할머니들의 수고스러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묵은 감정은 더 묵어지고 썩어간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면 생각도 흘러가고 정리되면서 다른 면이 보일 때가 있다.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게 어쩌면 나도 그들처럼 늙어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어떤 것을 더 알게 될까. 귀여운 그림을 오리며 그런 즐거운 미래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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